반짝이는 대도시의 이면 ‘나의 집은 어디인가’ [리뷰]
넷플릭스 ‘나의 집은 어디인가’ 리뷰 중산층 이상의 삶과 노숙인의 삶의 시각적 대비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법한 미국의 화려한 대도시들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접하는 이 대도시들은 낮이면 따스한 햇볕이 내리는 넓은 공원과 평화로운 사람들이, 밤이면 화려한 야경으로 시선을 빼앗는 도심을 생각나게 한다.
“지난 5년간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은 노숙 문제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 서부 대도시와 노숙, 전혀 매치되지 않는 단어다. 이 단어들이 상반되는 만큼 다큐를 통해 느껴지는 현실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넷플릭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화려한 대도시의 이면을 비춘다.
화려한 도시에 그렇지 못한 시민
다큐는 화려한 미 서부의 대도시를 비추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면에서는 정반대의 사람이 등장한다. 텐트 속에서 나오는 사람, 노숙자다. 대도시의 집 창문에는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이고 있지만, 노숙자는 도로에 나와 양치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 다큐에서는 이런 식의 배치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대도시의 한쪽에는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텐트에서나 혹은 고장 난 자동차 안에서나. 이런 화면 전환은 우리에게 이질감을 선사하고 불편한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낸다. 지나치게 대조적인 장면에 노숙자들의 삶은 더욱 가슴에 새겨진다.
‘노숙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냄새나고, 더럽고, 술에 취해 있으며 노력 없이 남에게 빌붙어 삶을 연명하는 걸인. 그렇지만 이 다큐에서는 노숙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노숙인 지원 단체에서 노숙자 취약성 평가를 하는 모습을 담는데, 노숙을 하게 된 원인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냥 단순한 질의응답일 수 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현실’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나레이션도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한 노숙인은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우리를 서둘러 깨우면서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할 때, 나도 당신들과 다를 거 없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이도 닦고, 식사도 해야 하니까요. 저도 남들 하는 건 다 하거든요. 다를 게 없어요”
또 다른 여성은 전혀 노숙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녀도 있다. 그리고 일도 하고 있었고 집도 있었다. 이유는 ‘복지 정책’의 구멍에 있었다. 처음 삶이 무너졌을 때 단체의 도움을 받아 집과 직장을 얻게 됐지만, 그가 집과 직장이 생겼다는 것이 보고되는 순간 저소득층 식비 지원인 ‘푸드 스탬프’가 줄어들었고, 결국 집세 낼 돈으로 자녀의 식사를 책임지게 됐다.
그는 인터뷰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웃긴 게 뭔지 알아요? 심각한 상황까지 서서히 빠져들다 보면 그만큼 체감이 안 돼요” 그도 본인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단순히 정말 ‘돈이 없어서’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재기의 단계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떨어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집값을 버티지 못하고 거리로 나앉게 되는데, 그 모습이 낯설지는 않다. ‘이 많은 집 중에 내 집은 한 채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한 자원봉사자가 내뱉은 한 마디는 잊혀지지 않는다.
“나도 급여 한 번 못 받으면 당신 곁 텐트 신세거든요.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NOT IN MY BACKYARD
‘NIMBY’ 님비현상. 모두가 싫어할 만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해 내 주변만 아니면 된다는 의미. 그런데 그 단어는 가혹하게도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노숙은 노숙인에게도, 지역 주민에게도 공중 보건, 치안, 위생, 발병위험, 폭력 범죄 여러 방면에서 문제가 된다. 실제로 여성 노숙인의 경우 이유 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숙인 지원 단체는 노숙인 구역 정리 사업에 들어간다. 노숙인에게 쉼터를 제공해주거나 주거 형태 시설에 연결해주는 것이다.
문제는 노숙인 쉼터를 지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모든 동네에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쉼터는 노숙인을 끌어모은다며 반대한다. 사실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다. 노숙인 쉼터나 재활센터 설립에 반대하는 지역주민은 95%라고 한다. 쉼터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못하는 것은 마냥 이기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당신 집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40분의 짧은 분량에 억지로 많은 이야기를 담지 않았다. 그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시각적 대비를 통해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인간의 존엄성과 우리의 삶을 고찰하게 한다.
노숙 문제는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복지가 무너졌을 때 혹은 사회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도 저렇게 되겠구나’, ‘남 일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길을 잃었을 때, 삶이 힘들 때, 조금은 쉬고 싶을 때 생각나는 집.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Lead Me Home.’ 데려다 줄 수 없는 집을 찾는 그 말에 그저 침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