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액션] 알고 보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 ‘선산’ (넷플릭스)
19일 공개 넷플릭스 오리지널 ‘선산’ 한국적 색채 물씬, 독보적 세계관으로 눈길 부족한 개연성 가득 채운 배우들의 열연
영화나 드라마가 가진 반전이란 무릇 통쾌해야 하지만, 때론 불쾌의 정점을 찍으며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선산>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넷플릭스 새 오리지널 시리즈 <선산>은 존재조차 잊고 지내던 작은아버지의 죽음 후 남겨진 선산을 상속받은 서하(김현주 분) 주변으로 불길한 일들이 연속되고, 이와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 <부산행>과 <반도>, <정이> 등을 통해 기발한 상상력을 자랑해 온 연상호 감독이 기획과 극본을 맡았고, 이들 작품에서 조연출로 활약한 민홍남 감독이 첫 연출에 나섰다.
이야기는 깜깜한 밤 시골길을 걷던 한 노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쓰러진 노인 옆에 뒹구는 막걸리 병과 음산한 분위기는 그의 죽음 뒤에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노인의 죽음 소식은 유일한 혈육인 조카 서하에게 전달된다. 한 대학의 시간강사인 서하는 작은아버지의 존재조차 잊고 현실에 치여 살아가던 인물. 생전 작은아버지가 소유했던 선산의 유일한 상속자이기도 하다.
슬픔보단 얼떨떨한 마음으로 시작한 작은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서하는 이복동생 영호(류경수 분)를 마주한다. 어린 시절 스치듯 보긴 했지만, 동생과 오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던 서하는 “나도 아버지 자식이고, 선산에 자격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영호에게 반가움은커녕 위협감을 느낀다.
이후 서하의 주변에는 섬뜩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부부싸움 후 혼자 차에서 내린 남편 재석(박성훈 분)은 총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고, 영호는 ‘삼재를 물리친다’는 핑계로 홀로 살게 된 서하의 집 앞을 닭 피로 물들인다. 경찰로부터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여긴 서하는 심부름센터 강 사장(현봉식 분)을 고용해 영호의 뒷조사를 벌이지만, 강 사장 역시 참혹하게 살해된다.
한편 노인의 죽음을 심상치 않게 여긴 경찰 성준(박희순 분)과 상민(박병은 분)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과거 성준의 아들에게 당한 습격으로 장애를 얻은 상민은 형사 반장의 자리에 있지만, 성준을 향한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독단적인 수사를 펼친다. 과거에 사로잡혀 감정의 골이 깊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고, 이후 함께 거대한 진실에 다가선다.
노인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추악한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미스터리는 계속된다. 서하를 향한 압박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그 실체에 대한 진실이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면서다. 휘몰아치는 전개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선산>은 공개 이후 줄곧 [데일리 OTT 랭킹] 넷플릭스 1위를 지키고 있으며, 23일(현지 시각) 넷플릭스가 발표한 글로벌 TOP10 TV쇼(비영어) 부문에서는 당당히 4위에 오르며 글로벌 흥행을 위한 예열을 마쳤다.
이처럼 <선산>이 매서운 초반 흥행세를 보이는 데는 ‘짧고 굵은 서사’가 주효했다. 극 초반 그려진 노인의 죽음은 너무도 쉽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만,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에서는 거대한 반전이 드러나기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소재를 그려내는 과정에 도사린 진실은 호불호가 갈릴 정도로 충격적이지만,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과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극대화한 연출도 보는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멀찍이서 담아낸 선산, 눈 쌓인 논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호의 기이한 행동은 역동적으로 담아낸 굿 장면이나 근거리에서 포착한 신당의 화려한 색감과 대비되면서 오싹함을 자아낸다. 작품 전반에 낮게 깔린 기묘한 음악도 긴장감을 배가한다. “영상 자체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분위기에 인간의 불안한 정서가 더해지며 긴장감을 몰고 갈 것”이라는 민 감독의 자신감이 고스란히 현실로 이뤄진 모습이다.
다만 어딘가 허술한 전개는 아쉬운 평가를 부르는 요소다. 커다란 줄기가 되는 서하 아버지의 부재는 무책임할 정도로 단순하게 그려졌고, 반전을 품은 주요 인물인 명희(차미경 분)는 비극적 과거와 극악무도한 악행 외에 어떠한 서사도 보여주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에만 간결히 답할 뿐,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두 형사가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치밀한 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동네 아주머니들의 ‘카더라’에 의존하는 모습이다. 이는 독보적인 영상미와 긴장감 넘치는 음악으로 차분히 쌓아 올린 스릴을 허무할 정도로 단숨에 무너뜨리고 만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과소평가한 듯 밋밋한 캐릭터도 발목을 잡는다. 이같은 특징은 사건 해결에 나선 두 형사 상민과 성준 역을 맡은 박병은, 박희순의 활용법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맹목적이면서도 방향감각을 잃은 상민의 분노는 보는 이들의 공감을 사기에 역부족이었고, 그런 상민 앞에 무기력한 성준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도 쉽게 풀려버린 두 사람 사이 감정의 골은 이들 배우의 피 튀기는 캐릭터 열전 또는 중년의 치명적 브로맨스를 예상했던 시청자들의 기대를 보란 듯이 외면했다.
상상력을 지나치게 많이 요하는 허술한 개연성과 식상한 대사 등 숱한 ‘불호’ 요소 사이에서 <선산>을 지탱하는 건 단연 배우들의 힘이다. 김현주는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새로운 얼굴로 나타나 현실에 찌든 시간강사 서하를 완벽하게 그려냈으며, 박희순은 묵직하고도 안정적인 모습으로 이야기의 중심을 잡았다. 박병은은 작품 전반에 깔린 스릴러와는 다른 결의 긴장감을 선사하며 극의 지루함을 덜어냈고, 류경수는 장르를 의심하게 할 정도의 오컬트적 분위기로 시종일관 분위기를 지배했다.
“한국인이라면 선산을 두고 가족 사이에 싸움이 났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라는 연 감독의 말처럼 ‘선산’이라는 소재는 자칫 진부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선산>은 이 뻔한 소재를 불쾌할 정도로 충격적인 반전을 이용해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의 몫을 200% 이상 해내는 배우들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품이 끝나고도 맴도는 비릿한 불쾌감을 감당할 수 있다면 <선산>은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악명 높은 반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주인공 서하의 옷을 입은 김현주가 놀람과 분노를 담아 대신 욕해준다. 그것도 아주 찰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