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사라진 신화 속 인간들의 이야기, 영화 ‘트로이’ [리뷰]
유럽의 신화 중 한국인들에게 유독 익숙한 신화가 있다. 바로 그리스로마신화다. 오딘이나 로키 등 북유럽 신의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할 사람들도 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라면 열 개가 넘는 이름을 줄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신화를 익숙하게 여기는 이들은 파리스의 황금사과의 이야기도 어렴풋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사과를 만들고, 황금사과를 본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각자 그 사과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싸움이 끝나지 않자 세 여신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사과의 주인이 누구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헤라는 권력을, 아테나는 힘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대가로 약속한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준다.
이후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약속대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우스의 아내였다. 헬레네와 파리스는 트로이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고, 이에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으로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목숨을 잃고, 트로이는 멸망한다. 파리스도 목숨을 잃는다.
신화적인 입장에서 보면 신들의 거대한 다툼에 말려든 인간의 무력한 비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19세기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로 도시 ‘트로이’가 실존했던 국가임이 알려지면서 트로이 전쟁은 신화를 뛰어넘어 역사적 증거를 얻었다.
트로이가 실존했던 국가인 만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기록된 트로이 전쟁 또한 실제 있었던 사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세 여신이 황금 사과를 두고 싸운 일이 실제 역사일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영화 ‘트로이’는 이 ‘트로이 전쟁’을 현실적인 시선에서 바라본다. 영화는 신들의 존재를 배제하고 오직 인간들의 시선에서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머릿속에 있는 신화적 환상을 지운 인간의 사랑, 전투, 죽음을 날것 그대로 접하게 된다.
<트로이(Troy)>
“어디서 볼까? 웨이브, 왓챠, 쿠팡플레이”
역사 속의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는 2004년 미국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2004년 5월 21일 국내 개봉했으며, 꾸준한 인기를 구가한 덕분에 2020년 7월 3일 33분이 추가된 디렉터스 컷으로 재개봉한 바 있다. ‘에어포스 원’, ‘퍼펙트 스톰’ 등 유명 영화를 제작한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액션, 드라마, 전쟁, 모험 영화다.
출연진으로는 브래드 피트, 에릭 바나, 로즈 번이 주연으로 참여했으며, 숀 빈, 브렌단 글리슨, 세프론 버로우스, 올랜도 블룸, 다이앤 크루거, 브라이언 콕스, 줄리 크리스티, 피터 오툴 등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네이버 관람객 평점은 9.33(평가자 21명), 네티즌 평점은 8.64(평가자 3895명)이며 영화 평점 사이트 왓챠피디아에서는 5점 만점에 3.7점(평가자 34만명)을 기록했다. 러닝타임은 163분, 디렉터스 컷을 기준으로 하면 196분이다.
영화 내에서도 신화와 같이 파리스(올랜도 블룸)와 헬레네(다이앤 크루거)가 트로이로 도주를 감행한다. 이에 분노한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오스(브렌단 글리슨)가 자신의 형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데살라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통일한 아가멤논은 동생의 부탁을 받아들여 전쟁에 나선다. 이때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가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아킬레스는 전쟁터로 떠나기 전, 전쟁에 나설 경우 영광을 얻는 대신 죽음을 맞으리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아킬레스는 안온한 삶이 아니라 영광과 죽음을 택한다. 그는 전리품이 된 트로이의 왕녀이자 신녀 브리세이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다 죽거든. 늘 마지막 순간을 살지.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 이 순간 넌 가장 아름다워, 이 순간은 다신 안 와.”
아킬레스의 말대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 영화는 전쟁이라는 배경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대표적으로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죽음의 예언을 듣고도 전쟁터로 향한 아킬레스를 들 수 있을 것이고, 나라를 위해 죽음을 짐작하면서도 아킬레스의 칼 앞에 선 헥토르도 명예를 위해 죽음을 택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한 영예의 획득은 어찌 보면 덧없게 느껴진다.
영화는 그래서 이들의 죽음에 다른 의미를 덧칠한다. 아킬레스는 결국 영광스러운 전투 중 죽음을 맞지 않고, 연인 브리세이스를 구하고 피신시키면서 목숨을 잃는다. 트로이를 위해 아킬레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헥토르는 영화 초반 그리스 연합군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전투에 임할 때 나에겐 원칙이 있다. 단순한 원칙이다. 신을 섬기고 내 여자를 지키며 조국 트로이를 사랑하라!”
헥토르는 결국 사랑하는 트로이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지만,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이에게는 도시와 함께 화를 맞기보다는 트로이를 떠나라고 말한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사랑하는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아들을 살해한 원수 아킬레스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사실 더 거슬러 생각해보자면, 이들의 죽음과 비극은 모두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인간들의 전쟁터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의 사랑과 죽음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신화 속, 역사 속 인물들을 향한 공감을 자아낸다. 사랑과 죽음만큼 인간에게 원초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는 없을 것이다. 트로이는 두 소재를 적절하게 사용해 긴 러닝타임을 흥미진진하게 끌어간다.
섬세한 감정 묘사에 더해서 그리스 로마 유물 전문가를 전문가에게 고증을 맡기고, 7만 5천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현장감을 살린 감독의 선택은 영화 속 인물들은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800명의 엑스트라에게 3개월 간 군사훈련을 진행해 만들어 낸 사실적 전쟁 장면도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역사영화, 그리고 전쟁영화를 사랑한다면 오늘은 영화 ‘트로이’를 통해 그리스로마신화의 한 장면을 새로운 관점에서 경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