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이애나의 시선으로 엿보는 영국 왕실의 사흘, ‘스펜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로 전 세계가 추모의 물결에 휩싸였다. 찰스 3세는 여왕의 서거와 동시에 새로운 국왕이 됐다. 하지만 한 세기 가깝게 영국 왕실의 상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마당에 왕실의 존재 이유가 있느냐는 공화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영국 내 찰스 3세의 비호감 이미지도 군주제 폐지에 힘을 싣는다. 그리고 그 배경엔 모든 영국인들이 사랑했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결별이 있었다. 두 사람이 긴 이별을 하는 과정에서 찰스 3세가 현재 왕비인 카밀라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영국인들에게 엘리자베스 2세를 대신해 왕실을 상징할 수 있는 여성은 다이애나가 유일했고, 그런 다이애나가 왕실의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탓에 왕실은 커다란 상징성 하나를 잃었다.
영화 <스펜서>는 고(故)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시선을 따라 영국 왕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전 세계의 언론과 파파라치들이 주목한 인물인 만큼, 다이애나 스펜서를 둘러싼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어린 시절을 비롯해 왕세자비가 되기까지의 과정, 왕실에서도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던 순간들, 그리고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했던 이혼 과정, 이혼 후 그녀의 삶… 감독은 그런 모든 풍성한 이야기를 밀어둔 채 샌드링엄에서의 단 사흘을 조명하며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한 인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다.
왕실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샌드링엄으로 향하는 다이애나. 혼자 운전하던 그녀는 길을 잃자 차를 세우고 카페테리아에 들어가 길을 묻는다. 뒤늦게 도착한 별장에 입장하기 위해선 따라야 할 전통이 있다. 별장에 도착할 때와 떠날 때의 몸무게를 재는 것. 다이애나는 피하려고 하지만 “전통엔 예외가 없다”는 지시에 가까운 안내에 억지로 몸무게를 잰다. 역시나 전통에 따라 난방을 하지 않는 별장, 그녀의 방에서 다이애나를 맞은 것은 방에 놓인 ‘앤 불린’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헨리 8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앤 불린의 환영은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 내내 다이애나를 괴롭힌다.
남편인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유일한 말벗인 매기를 런던으로 보내버리고 다른 의상담당자를 붙여준다.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남편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은 다이애나가 그들에게 빌미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옷 갈아입는 사진이 찍힐 염려를 없앤다는 핑계로 방의 커튼에 모조리 박음질을 해 버리기도 한다.
다이애나는 모두가 모이는 식사 자리에 가는 것을 어떻게든 피해보려 하지만, 아들 윌리엄조차 “모두를 위해 마음을 꺼두면 안되겠느냐”고 말하자 깊은 회의감을 느낀다. 그렇게 참석한 식사 자리에서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영을 본다. 그녀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느낀 찰스 왕세자는 다시 매기를 불러 다이애나에게 치료를 권하도록 한다.
매기는 다이애나에게 마지막으로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은 언제인지, 가장 신선한 충격은 무엇이었는지,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본 적은 있는지 묻는다. 다이애나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그나마 전날 밤 아이들과 촛불을 켜놓고 몰래 선물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전부다. 매기의 말처럼, 다이애나에게 필요한 건 사랑과 충격,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이다.
꿩에게 총을 쏘고 싶지 않다던 아들들이 왕실의 크리스마스 전통에 따라 꿩 사냥터에 불려간 것을 가만히 생각하던 다이애나는 무언가 결심한다. 과연 다이애나는 어떻게 사랑과 충격,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현실의 다이애나는 결혼 11년 만에 찰스 왕세자와 별거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4년 뒤 정식 이혼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흐른 후,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이애나가 왕세자비였던 시절부터 끊임없이 괴롭히던 파파라치들은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난 현장에 달려든 파파라치들의 더 자극적인 사진을 찍기 위한 광기는 구조를 지연시켰고, 결국 다이애나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웃음을 되찾기 위한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단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이 났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작품은 철저히 다이애나의 시선으로 전개됐다. 그의 시선으로 엿본 샌드링엄에서의 사흘은 다이애나가 감내해야 했던 10년을 가늠하게 한다. 찰스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은 악인으로 그려지진 않았지만, 공감 능력만큼은 철저히 결여된 인물로 표현된다.
단 사흘의 휴가를 보내는 와중에도 그녀가 따라야 할 전통과 규칙은 계속해서 다이애나를 괴롭혔고, 족쇄는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의 모습으로 왕세자비의 목에 채워졌다. 파파라치들의 광기만큼 그녀를 괴롭혔던 건 바로 그 모든 것이 다이애나의 탓이라고 압박하는 왕실의 눈초리와 기세였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영화는 영국의 흐린 하늘과 코트를 여미게 하는 찬바람을 화면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움츠러든 다이애나에게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올해 3월 국내에 소개되며 8만여 명 관객을 모았다. 많은 관객은 아니었지만, 이후 OTT 왓챠 등을 통해 선보이며 네이버 평점 10점 만점에 7.7점, 왓챠피디아 5점 만점에 3.7의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특히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관객들이 열광한 것은 다이애나로 완벽 변신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였다. 처음 영화의 캐스팅이 발표됐을 당시 미국인이 영국 왕실의 상징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셌던 것과 비교하면 영화는 공개 후 엄청난 호평을 들은 셈이다.
다이애나로 완벽 변신하기 위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6개월간 영국 억양을 배웠고, 영화 촬영 내내 강사를 동행시키며 연기 열정을 불태웠다. 영화의 시작 부분 길을 잃은 다이애나가 카페테리아에 들러 길을 묻는 장면은 생전 다이애나의 영상을 본 사람들에겐 동일 인물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스펜서>를 통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것을 비롯해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석권하며 하이틴 스타에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영국 왕실은 무척 폐쇄적이어서 닫힌 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며 “이런 특성 때문에 ‘스펜서’에는 픽션적인 요소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다이애나 스펜서의 시선을 빌려 화려한 영국 왕실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스펜서>는 충분한 답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다이애나의 미래를 알고 있는 채로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단골 멘트, “우리는 자유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가만히 곱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