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랑을 지나치치 않는 건 행운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계절로 기억되는 사랑이 있다. 화사한 벚꽃 길을 함께 걷는 설렘으로 기억된 봄 같은 사랑이 있는가 하면, 꽁꽁 언 손을 마주잡고 입김을 불어넣던 애틋함으로 기억되는 겨울 같은 사랑이 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향기와 함께 끈적함을 남긴, 잘 익은 과일로 기억되는 여름 같은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안드레 에치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들 중 가장 성공적인 영화로 꼽히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색상을 비롯해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79관왕을 기록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4%, 관객 점수 86%, IMDb 평점 10점 만점에 7.8의 우수한 성적과 함께 “가득한 햇살만큼 축복으로 다가오는 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우리나라엔 2018년 3월 소개됐다.
주인공 엘리오(티모시 샬라메 분)는 가족과 함께 매년 여름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보낸다. 엘리오의 아버지는 이 6주 동안 젊은 학자의 도움을 받아 고고학 연구에 집중한다. 1983년 여름, 펄먼 교수(마이클 스털버그 분)를 도와줄 조수는 올리버(아미 해머 분)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한 올리버의 모습에 엘리오는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가지로 향한다. 며칠 뒤 다시 찾은 시내에서 올리버는 엘리오보다 익숙하게 길을 찾고 사람들과 어울린다. 엘리오는 자신의 묘한 불편함을 가족들 앞에서 넌지시 꺼내 보인다. 올리버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Later”(나중에 봐요)가 무례하고 거만해 보이지 않느냐며. 하지만 모두들 올리버에게 우호적이다.
그날 밤 열린 가든파티에서도 올리버는 모두의 주목을 받는다.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 엘리오는 자신을 좋아하는 마르치아(에스더 가렐 분)의 손을 잡고 파티장을 빠져나온다. 두 사람은 단둘이 밤 수영을 한 후 아무 일 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어머니가 읽어주는 연애 소설을 들으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엘리오는 결국 올리버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는다. 하지만 그날 이후 올리버는 거리를 두려 한다. 욕실을 함께 쓸 정도로 맞닿은 방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 일부러 열어둔 엘리오의 방 문까지 친절하게 닫아준다.
엘리오는 다시 마르치아와 데이트를 하며 그를 잊으려 한다. 하지만 여자친구와의 달콤한 데이트를 하고 온 후, 그는 다시 편지를 쓴다. 자정에 보자는 답장 한 마디에 하루 종일 시계를 들여다보며 애를 태운 엘리오는 그날 밤을 올리버와 함께 보낸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지만 시간은 많지 않다. 이별의 순간은 다가왔고, 처음 만날 때 입었던 셔츠를 자기에게 주고가라며 헤어짐이 당연한 일인 듯 이야기했던 엘리오는 올리버와의 이별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대로 끝나며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남게될까.
국내엔 『그해, 여름 손님』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엘리오의 내면은 아주 긴 지문으로 표현된다. 상세한 묘사를 통해 독자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계를 지었다 허물기를 반복하는지 엿볼 수 있다. 직접적인 설명을 덧붙일 수 없는 것은 물론, 관객들이 3인칭 시점일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한계를 감독은 다양한 장면 활용을 통해 훨씬 효과적인 방법으로 담아냈다.
엘리오의 혼란한 마음은 그가 물에 몸을 담그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처음 상대를 향한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낄 때는 마당에 있는 작은 수영장의 주변에만 머물며 올리버를 탐색하더니, 그를 향한 마음이 질투라고 느껴지는 시점엔 호숫가에 가서 모든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과감히 뛰어든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 올리버와 함께 찾은 호숫가에선 잔잔한 물에 발을 담근 채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올리버의 심리는 신발로 드러난다. 모두가 사랑하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의 그는 항상 별이 그려진 하이탑 컨버스를 신는다. 처음 엘리오를 만나던 날도, 파티의 주인공으로 춤출 때도 그의 발에서 떠나지 않던 이 컨버스는 엘리오와 처음 함께하던 날 밤엔 밋밋하고 검은 스니커즈로 바뀌어 있다. 이후 두 사람이 아슬아슬한 로맨스를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이 밋밋한 신발을 고집하며 조금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컨버스를 꺼내 신으며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전체 화면을 가르는 길로 표현된다. 처음 함께 자전거를 타던 날 아무 존재감 없이 바닥에 깔려있던 길은 엘리오의 고백 직후엔 날카롭게 한 모서리를 가르는 직선으로 전면에 나선다. 이후 경직을 푼 두 사람이 달리는 길은 어느새 곡선으로 부드러워져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막바지,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떠나 서로를 향한 애정을 마음껏 표현해도 좋을 만큼 최고의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돌과 바위가 깔린 험난한 산길을 오른다.
이 모든 장면들을 감독은 줌 기능이 없는 35mm 싱글렌즈로 촬영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가장 흡사한 화면을 담아낸 이 촬영기법 덕분에 관객은 작품에 녹아들어 생생한 이야기에 빠져든다.
영화는 그동안의 많은 퀴어 콘텐츠가 성소수자와 주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조명하느라 상당 시간을 허비했던 것과 정 반대로 주인공 두 사람의 로맨스에만 집중한다. 본격적인 로맨스는 영화의 중반에 가서야 시작되지만, 작품 속 갈등은 인물의 내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로맨스를 해치치 않는다. 관객들은 불필요한 방해를 받지 않고 평범한 로맨스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으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가족과 주변 인물들이 다소 평면적이거나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졌다는 지적도 있다. 엘리오를 오랜 시간 좋아했지만 결국 상처를 받게 된 마르치아는 “사랑하지만, 평생 친구로 남자”며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부모님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들의 사랑을 위해 이별 전 마지막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배려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비현실적이지만 이상적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우리가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엘리오의 부모님은 그가 사랑에 빠지자 ‘상대가 누구인지’보다 ‘사랑에 빠진 아들의 마음’에 집중한다. 올리버가 떠난 기차역에서 전화를 걸어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무 것도 묻지 않으며, 아버지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런 낭비가 어딨겠니”라며 첫사랑의 열병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위로를 건넨다. 결국 작고 여린 열일곱의 엘리오는 우리 모두의 열일곱이다.
주연 티모시 샬라메의 열연이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을 만나 빛을 발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성소수자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만 없다면 누구나 공감할 만큼 아름다운 로맨스이자 성장물임이 분명하다. 어느새 모습을 감추려는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이 영화를 본다면, 지독하게 아프기만 했던 첫사랑이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