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미국식 표현의 자유로 재탄생한 마릴린 먼로, 넷플릭스 ‘블론드’

사진=넷플릭스

회중시계를 든 토끼,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는 고양이. 판타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며 소설가를 꿈꿨던 한 소녀는 훗날 ‘고딕 소설의 대가’라는 별칭과 함께 꿈을 이룬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사랑스러운 동화나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다. 어둠과 서늘함이 주가 되는 그의 소설에서 재탄생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은 불우한 여인이자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약물과 남자에게 의존한다. 소설 『블론드』 속 마릴린 먼로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블론드』가 영상화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마릴린 먼로는 복잡한 내면은 모두 삭제된 채 섹스 심볼 이미지만을 쥐고 관객들을 만난다. 넷플릭스 영화 <블론드>는 그의 불행했던 삶을 여러 자극적인 일화를 통해 집요할 정도로 다각도에서 세뇌시킨다.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맡은 앤드류 도미닉은 “모두 마릴린 먼로의 NC-17 등급(미 OTT 내 최고 수위) 콘텐츠를 기다렸던 것을 알고 있다”며 “이 영화가 별로라면 그건 망할 관객의 문제”라며 노이즈 마케팅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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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아니었던 노마 진의 어머니는 약에 취해 아이를 학대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학대에서 도망쳐 이웃에게 도움을 청한다. 옷도 입지 못하고 도망친 노마 진을 다독여준 이웃은 좋은 어른이었지만, 아이를 오랜 시간 돌볼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아이는 고아원에 보내진다. 이후 성장한 노마 진은 사진 모델로 생계를 이어 나간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한 채.

연기 선생님의 소개로 한 영화사 임원과 만남을 갖게된 마릴린. 영화사의 임원은 그녀의 연기보다 몸을 더 유심히 훑는다. 그는 마릴린에게 몹쓸 짓을 한 다음에야 자신의 영화에 출연시킨다. 방법이 어찌됐든 영화계에 입성해낸 마릴린은 이후 적극적으로 업계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바삐 움직인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 영화 산업을 주도하는 이들은 모두 남자였고, 그들은 마릴린이 선보이는 연기보다 그녀의 엉덩이에만 관심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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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은 우연히 찰리 채플린의 아들인 캐스와 그 친구 에디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만남은 세간이 주목하는 섹스 스캔들로 이어지지만, 마릴린은 만남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릴린은 아이를 가지게 된다. 엄마가 된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차기작을 위해 아이를 낙태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후 자연스럽게 두 남자와 멀어진 마릴린은 유명 야구선수 출신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부재에 결핍을 느꼈던 마릴린은 남편을 “아빠(Dad)”라고 부르며 난생 처음 겪어보는 가족의 삶에 녹아들기 위해 애쓰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작품 홍보를 위한 마릴린의 노출과 섹스어필을 못견뎌한 남편과 얼마 가지 않아 결별한다.

다시 배우로서의 삶에 집중하던 마릴린은 오디션에서 만난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작품 내)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이번엔 조금 더 완벽하게 엄마가 될 준비를 마친 마릴린 이었지만 원치 않았던 유산으로 또 한 번 아이를 잃는다. 이때부터 마릴린의 삶은 더 참혹하게 짓밟히며 약물에 의존하는 등 타락의 길을 걷는다. 대중이 보는 마릴린 먼로는 언제나 활짝 웃고 있었기에 그의 내면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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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론드>는 전기 영화인 척 주인공의 유년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학창 시절은 과감하게 건너뛰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마릴린 먼로가 등장한다. 그리고 세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 걸쳐 한 인물이 내면의 빛을 서서히 잃어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본다. 관객은 이 과정에서 무력감을 마주하게 된다. 무력감은 영화계라는 시스템과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 스타의 불행한 순간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영화사 임원에게 아무 저항 없이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 자극적인 섹스 스캔들이 사실이었음을 암시하는 장면, 불필요한 장면에서 계속 상의를 벗고 등장하는 주인공, 실제 마릴린과 무관한 성행위 묘사 장면 등. 작품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고인 모독’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꼭 잔인한 시련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도리어 화려한 스타의 삶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며 박수를 보내는 경우도 많다. 적어도 <블론드>의 감독은 시대가 변하며 달라진 관객들의 취향을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작가와 감독이 지닌 불순한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마릴린 먼로는 철저히 이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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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화면 구성은 눈길을 끈다. 영화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것도 모자라 1.33:1에서 1.85:1, 2.39:1까지 다양한 화면비를 자유롭게 오간다. 문제는 이런 자유로운 화면의 전환이 어느 타이밍에 이뤄지는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흑백으로 표현된 몇몇 장면들은 숨이 막히게 뛰어난 영상미를 자랑하지만, 수시로 색과 비율을 바꾸는 화면은 몰입도를 끌어올리기보단 피로도만 늘릴 뿐이다.

주연 아나 데 아르마스의 연기만이 마릴린 먼로의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연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창작자들은 한 인물을 이야기 내내 끊임없이 학대하며 극단에 몰아넣기 바쁘다. 설사 감독의 의도가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부당함을 알리려는 데 있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는 훨씬 잔인한 방식으로 마릴린 먼로를 소비했다.

엄연히 실존했던 인물 노마 진. 그는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으로 대중 앞에 서며 백치미를 연기했지만, 동시에 흑인 민권 운동을 후원했고, 동물학대를 멈출 것을 호소하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종종 극장을 찾아 관객들과 함께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관람하는 소탈한 사람이었다. 더불어 헐리우드의 여배우 가운데선 처음으로 독립 프로덕션을 설립할 만큼 영화를 사랑했다. 그가 죽어서까지 가십의 중심에 서야 할 이유는 없다.

놀라운 사실은 <블론드>를 제작한 이가 헐리우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로 꼽히는 브래드 피트라는 점이다. 마릴린 먼로와 비슷하게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는 복잡한 연애사와 자녀를 학대했다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브래드 피트는 죽음 후 미디어가 그려낼 자신에 대한 평가와 묘사에 자신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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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로튼토마토 관객 지수 32%, IMDb 평점 10점 만점에 5.6의 다소 아쉬운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영화 평론가 Grace Randolph는 자신의 SNS를 통해 <블론드>를 “전기 영화를 가장한 강간 판타지”라고 강도 높게 비난하며 평론 자체를 거부했다. 반대로 일부 평론가들은 “선정성 논란에 가려진 매혹적인 작품”이라는 호평을 내놓기도 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영화가 없듯 절대적으로 나쁜 영화도 없다.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영화가 예술로 다가올지, 아니면 무의미한 폭력으로 도배된 포르노로 다가올지, 그도 아니면 아무 감흥 없이 반도 못 보고 포기를 선언하게 되는 지루함으로 다가올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블론드>를 통해 넷플릭스가 주장하는 미국식 표현의 자유를 들여다보자. 평가는 그 뒤에 자유롭게 해도 늦지 않다. 다만 우리와 똑같이 살아 숨 쉬는 한 인물이었던 마릴린 먼로에 대한 존중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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