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프로그램 ‘선계약 후공급’, 건설사의 ‘건설중인 자산’ 참고해야

콘텐츠 업계와 방송 플랫폼, 계약금 선지급이냐 방송 후 후지급이냐로 묵은 논쟁 과기부, 선계약 후공급으로 2021년 방향 정해, 세부 가이드라인 논의는 지지부진 전문가, 건설업계의 ‘건설중인 자산’ 개념 도입하면 실마리 풀릴 수도

유료방송사업자(SO)와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가 프로그램 대가 산정을 두고 협상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에서 ‘선계약 후공급’을 골자로 하는 채널 계약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가운데,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세부 가이드라인을 연내 확정한다는 목표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나, 현장의 참여가 부진한 데다 정부 계획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볼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2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이번 주 중에 프로그램 대가 산정에 대해 사업자들의 의견을 들을 계획이었다. 현재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연구반을 통한 프로그램 대가 산정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선공급 후계약 vs. 선계약 후공급

그간 유료방송시장은 PP가 SO에게 콘텐츠를 먼저 공급한 후 계약을 맺는 ‘선공급 후계약’ 방식으로 이뤄졌다. 콘텐츠 제작사가 모든 위험을 떠안는 구조다. 이 때문에 PP들은 예산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투자비를 책정하고 프로그램 제작 기획을 해야 하는 구조 속에 고급 콘텐츠가 나오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데다, 심지어 수익이 났을 경우 방송사가 그 수익에 우선권을 갖게 되는 구조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한 콘텐츠 제작사 관계자는 “방송 채널 갖고 있다는 이유로 ‘날강도’ 짓을 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과기부는 그간 PP들의 어려움을 아우를 수 있는 정책 지원안을 고민해왔고, 2021년에 업계의 오랜 염원이었던 ‘선계약 후공급’을 골자로 하는 채널 계약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올해 내로 자세한 세부 규정이 확정될지는 미지수이나, 콘텐츠 제작사들은 반기는 눈치다. 방송사가 콘텐츠 대가를 미리 지불하는 만큼 투자금 규모를 확정할 수 있고, 제작 기획도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콘텐츠 제작에 따른 위험 부담을 나눠 갖는 데다 수익성을 일부 공유할 수 있는 만큼, 콘텐츠 제작사의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었다.

불편함을 표현하던 지상파와 종편 등에서는 세부 안건 논의에 불참했고, 과기부는 올 상반기까지 프로그램 대가 산정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으나 올해가 끝나가는 상황까지 지지부진한 상태다.

<출처=OTT랭킹>

아파트 건설에서 ‘건설 중인 자산’의 개념 도입해야

일각에서는 콘텐츠 생산을 아파트 건설과 유사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계적으로 건설 중인 아파트는 ‘자산’으로 취급된다. 건설 초기부터 ‘분양’을 통해 입주 자격을 부여받은 예비 입주민들이 계약금, 중도금, 잔금 등을 은행 대출 등을 통해 미리 납부하고, 건설사들은 지불받은 자금을 이용해 아파트를 준공한다. 아파트 입주가 이뤄지는 시점에 ‘자산’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건설사들은 수익처리를 진행하고, 입주민들은 주거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미리 납부한 아파트 건설비를 건설사의 ‘수익’으로 처리할 경우, 건설사는 수익에 대한 세금을 매년 정산해 지불해야 하는 데다, 건설이 중단될 경우 건설비를 지불한 예비 입주민은 모든 피해를 뒤집어쓰게 된다.

얼핏 상식적으로 보이는 수익, 비용처리이지만, 입주민들은 분양받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을지 위험을 부담해야 하고, 건설사들은 완공도 안 된 아파트 건설에 대해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설중인 자산’으로 아파트를 인식하게 하고, 선분양은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건설사들에게 일정 수준의 규제를 가하는 현재의 방식이 정착된 것이 대규모 아파트 공급을 위해 군부독재시절에 이뤄졌다.

콘텐츠 제작도 아파트 건설과 형식적으로 다르지 않아

콘텐츠 제작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콘텐츠 제작을 위한 배우와 인력이 모인다고 해도 자본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화 티켓비를 미리 받을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로는 배급을 담당하는 극장 체인, 혹은 방송을 담당하는 방송사에서 아파트 입주민들처럼 제작비를 선지급하고, 정부에서 콘텐츠 제작사들에 대해 일정 수준의 규제를 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경우 대규모 아파트 공급이 가능해졌던 것처럼 콘텐츠 공급 시장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아파트 시장에서는 아파트 가격이 인상될 경우 입주민들은 건설사와 약속한 금액 이상의 가격으로 부동산 매각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아파트 공급 시장에 ‘떴다방’, ‘프리미엄’ 등의 부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파트 입주민과 건설사가 수익을 배분하는 만큼, 콘텐츠 제작 업계도 같은 논리로 ‘선계약 후공급’ 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

단, 미리 계약금을 받은 대형 제작사들이 방송사의 요청과 무관하게 자기들 방식대로 스케줄을 조정하거나 콘텐츠를 뜯어고칠 경우, 방송사들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과기부의 새 가이드라인은 이런 시정 사정을 감안해, 국토교통부의 ‘건설 중인 자산’ 개념을 빌려오면 양측 모두에게 좀 더 납득 가능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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