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과 이모님의 납작하지만 선명한 복수극 ‘더 글로리’ [리뷰]

송혜교와 김은숙의 두번째 만남… ‘성공적’ 적나라한 폭력과 약육강식으로 그려내는 리얼리즘 약자들의 연대, 피해자 3총사가 그려낼 2부

사진=넷플릭스 공식 유튜브

“너네 혹시 우리 고등학교 때 기억나? 자세히? 우리가 문동은한테 어떻게 했지? 심했나?”

씻을 수 없는 상처, 하루하루가 원통하고 괴롭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다 꿈에서도 시달린다. 누군가에겐 빛나는 청춘이자 소중했던 학창 시절은 누군가에겐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이다. 가해자들은 그 폐허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더 글로리>, 요 근래 넷플릭스 최고의 화제작이다. 휴머니즘의 화신 선한 의사 강모연(태양의 후예)에서, 극야와 안개로 상징되는 복수귀 문동은으로 분한 배우 송혜교의 변신과 멜로드라마의 제왕, 김은숙의 복수극이라는 조합은 방영 전부터 화제와 기대를 모았고 우리 모두의 기대를 훌륭히 충족시키며 하염없이 part 2를 기다리는 수많은 팬을 양산했다.

복수극답게 이야기 구조는 아주 간단하다. 불합리한 폭력, 절망과 고난을 딛고 일어나 18년간의 수련을 거쳐 복수를 위해 다시 돌아온 문동은이라는 태풍에 휘말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복수극의 구조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어떤 원한과 어떤 복수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서 작품과 작가의 역량이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문동은의 수련은 상당히 참신하다. 홀어머니도 버린 딸, 아무것도 없는 고졸 여공은 바둑을 잘 두는, 절간 사모님과 친분을 쌓아 놓은, 무엇보다도 교사가 되어 나타났다. 

최근에야 판타지나 무협 소설에서도 ‘멸시받던 인물이 기연을 만나 급성장해 보복’하는 서사가 아주 흔하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브라운관에서는 복수극이 금기시됐다. 김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은 높은 인기에도 불구, 미혼모의 복수가 미풍양속에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조기 종영됐다. 반면 영화나 만화에서는 복수담이 흔했다. 이현세, 허영만 등이 그려낸 사나이들의 승부와 설욕, 황미나와 김혜린의 서사시적 순정만화에서 그려지는 권력과 정치의 복수극, 그림만 봐도 바로 느껴진다.

그림=이현세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의 저자 이영미는 1980년대 만화를 일컬어 ‘사회적 성공과 함께하는 복수’라고 분석한다. 경쟁에서 승리하여 가해자에게 굴욕을 선사하는 합법적인 복수다. 그림만 봐도 느껴지는 이 영웅적 비장함, 그러나 21세기- 틱톡과 유튜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웅적 비장함’은 ‘오글거림’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당시 주인공들의 영웅성은 그들에게 뚜렷한 목적의식, 대의, 명분에 근거한다. 복수는 상대적 약자로서 고난의 행군을 겪는 와중 그들을 지탱하는 하나의 원동력일 뿐이다. 복수 자체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라 세상과의 대결, 불합리 타파에 그 목표가 있었다. 21세기- 돈과 폭력, 섹스의 3위일체가 승천하는 시대, 우리는 복수극의 앞뒤가 뒤바뀌어야 한다는 걸 안다. 사회적 성공, 권선징악 등은 복수의 곁가지다. 이제는 오직 나의 피해와 상실에 복무하여 응당 수행해야 할 복수 자체가 목적이다. 피해자는 마땅히 피해자답게, 가해자는 마땅히 가해자답게… 이제 복수에 대의와 정의는 필요 없다. 이해하기 쉽고 편리하고 정당한 구조를 따 와서 돈과 폭력, 섹스를 전시할 수만 있으면 된다.

대중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명확한 이분법적 도식 상에서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을 징벌하는 쾌적하고 올바르고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된 폭력과 자극을 원한다. <올드 보이>, <복수는 나의 것> 등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복수와 가해에 부여되는 정당성은 법과 도덕이 아니라 개인적 피해의 역사에서 온다. 간단한 경제적 논리다, 네가 나에게 피해를 줬으니- 내가 너에게 가하는 피해도 정당하다. 하지만 정확한 계산은 과연 가능할까. 아직 피해자로 남아있던 시절의 문동은은 학교폭력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했다.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 않았다. 학교에 알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아무도 돕지 않았다. 문동은을 도우려던 유일한 사람인 보건 교사는 퇴직당했다. 아이를 지켜야 할 어머니에게조차 버림받았다. 이 지점에서 박연진(임지연 분)의 “봤어? 내 모성본능?”이라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몸도 마음도 다 부서지고 텅 빈 동은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관계는 박연진, 그녀의 원수뿐이다. 

사진=넷플릭스 공식 인스타그램

이제 박연진이 가한 폭력과 모욕은 하나의 세례다. 폭력과 모욕의 기름 부음은 문동은을 새로이 태어나게 했다. 세례 이후, 박연진의 사도 문동은의 모든 행동과 결정의 원천은 박연진이다. 17년간의 편지는 일종의 자해이자 신앙고백이다.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서 멈출 수가 없고 오래도록 마음에 머문 증오는 마음과 하나가 되어 구분이 어렵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증오이고 어디까지가 본래의 나인가. 문동은은 이제 피해자이기를 거부하고 가해자이기로 결정한다. 자기의 행복보다 상대방의 파멸을 바란다. 교육부의 2022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를 호소한 고등학생의 수는 2,400명, 한 반당 한 명의 피해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2,400개 반에서, 한 학교당 한 명의 피해자가 있다면 2,400개 학교에서 학교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통계 서비스에 따르면 2022년 전국 고등학교 개수는 2,422곳. 방관자도 가해자라면, 우리 모두 가해자다.

“가난한 것들은 최대 가해자가 가족이야”… “넌 아무 잘못이 없어?”

그들은 피해자를 오히려 더 몰아세운다. 내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네가 더 나빠! 이를 바로잡아야 할 사회는 가해자의 편이다. 도대체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신뢰가 남아있기는 한가. 교사의 권위 자체가 부재한, 또는 일그러진 학교의 풍경은 극적으로 과장된 묘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폭력성에 대한 공감이 보다 두드러진다.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2차 가해하며 기득권에 부역하는 교사와 상식과 도덕이 부재한 학교와 교실의 풍경이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드라마 속 학교를 보며 공분과 공감을 느꼈다면, 뭔가 이상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면, 이 사회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스스로 체감하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계속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고 우리들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있어, 교육에 있어 처참하게 실패한 결과는 아닌가. 문동은에게 가해진 폭력은 제도화된 권력에 의한 사회 구조적 문제다.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이 사회와 제도로 영혼을 구할 수 없다. 사회적 정의를 논하는 사람이 정말이지 얼마나 순진해 보이는가? 현실적 정의는커녕 사적 정의마저 비웃는 사회에서 정의는 고루하고 법은 지루하다.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호소할 곳, 사법기관도 가해자의 편이다. 

“아 지겨워 진짜… 니들은 왜 다 그걸 묻냐?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지금도 봐. 네가 경찰서 가서 그 지랄까지 떨었는데 넌 또 여기 와있고 뭐가 달라졌니? 아무도 널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동은아. 그걸 다섯 글자로 말하면 뭐다? 사회적 약자.”

풀릴 길 없는 억울함은 원한이 되고 이 유독한 감정을 담고 사는 피해자는 폭력에서 벗어나더라도 계속해서 고통받는다. 그래서 더글로리는 물론, 약한 영웅, 돼지의 왕 등을 보기 힘들다는 시청자층이 많다. 반면 가해자는 그렇지 않다. 어떤 처벌이 주어져야, 어떤 복수가 이루어져야 피해자들의 고통이 덜할까. 최근 다시 유행하는 슬램덩크의 정대만은 명백하게 학교폭력을 저질렀다. 농구를 통해 개과천선한 그에게 적합한 처벌은 무엇일까.

이 지점에서 ‘더 글로리’는 납작해진다. 악인들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벌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고통받는 지점은 여성의 방탕함이나 문란함이다. 탁란, 성병, 낙태, 마약… 중요한 갈등 소재로 출생의 비밀, 친부와 생부 간의 대립이 쓰인다. 전형적인 통속극 소재다. 편견 가득한 소위 여초직군을 차용한 것도 게으르다. 기상캐스터, 승무원… 머리는 텅텅인데 얼굴만 예쁘고 상향혼을 원하는 여성상. 일진이 도달해야 할 마땅해 보이는 그 지점. 학폭을 명분 삼아 이런 사회적 편견에 기초해 서사를 전개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을 환원시킨 다음, 그 편견을 몰락의 계기로 삼는다. 무엇보다도 가해자들을 향한 징벌이 상술한 문란함, 음탕함 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및 징벌관과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다. 아무리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어도 끝내 육체적 존재로 환원되어 파멸하는 군상들. 쉽고 편리하다.

물론 작가로서 극 진행 시점에서 졸업한 학폭 가해자들을 처단하려면 불륜, 혼외자식, 마약 등의 외적 요소 없이는 자극도 덜하고 복수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박연진의 딸 하예솔이 등장한다. 어떻게 해야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겪은 것과 동일한 수준의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는가. 이미 인류사의 거의 첫 시작부터 끊임없이 논의된 철학적 난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표되는 동등한 손해로 갈음하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고전적 정의. 작가는 이 난제를 피해자가 선생이 되고, 가해자의 딸이 그 제자가 되는 방식으로 변주한다.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은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역설.

사진=넷플릭스 공식 유튜브

‘아주 말캉하고 뽀얀… 네가 제일 아끼는 고데기를 들 거야 연진아’

문동은이 박연진의 딸 하예솔을 고데기에 비유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문동은은 하예솔이라는 말캉하고 뽀얀 고데기로 박연진을 지지려 한다. 그런데, 과연 하예솔로 박연진을 지지는 것이 정말 죗값을 치르게 하는걸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당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정확한 복수는 가능한가.

일부 시청자들의 반응도 실망스럽다. 가해자를 승자라고 생각하며 이입한다. 계속해서 1차원적 폭력, 아주 작은 소리나 행동만 있어도 문동은의 트리거가 눌리는 걸 보여줘도 찐따의 복수, 싱크로율 100% 일진 연기라며 찬양한다. 찐따라는 단어와 일진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생각해 보라. 악역한테 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오해한다. 문동은이 괴롭힘 당하는 이유? 없다. 박연진이 싸이코인 이유? 없다. 박연진의 과거? 없다. 서사라고 할 뭔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억도 잘 안나는 과거가 언제 터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몸부림치는 그 삶이 부러울까. 작가가 피해자는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인터뷰도 하고, 대사도 넣고, 악역을 납작하게 눌러놓고 작정을 해도 구태여 악역에 이입한다. 그게 학폭 2차 가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투명한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의도적인 오독. 아무리 악인이라도 겉으로 섹시하고 화려하고 멋지면 따라오는 숭배와 찬양 그리고 이입. 이것은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느 쪽에 서고 싶은지의 문제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문동은도 가해자를 꿈꾸고 있지 않은가.

저 모든 폭력의 세계가, 저 모든 드라마가 현실의 그림자라면 우리가 느끼는 카타르시스 또한 현실의 그림자일까. 드라마 속 상상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정말 그런가? 더글로리와 현실의 사이가 너무 얇다. 이 이야기는 결코 유쾌할 수도 통쾌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동은의 복수는 상승이 아니라 하강이다. 밑바닥을 해집어 진흙탕으로 만든다.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차라리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 복수. 그래서 자유는 없고 복수에 성공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복수의 성공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복수의 과정 속에서 동은이 겪는 고통들, 가해자들의 저열함, 그 무자비한 단죄. 그리하여 드라마 속 인물이 아닌 현실의 가해자들을 호명한다. 최소한 그들을 불편하게 한다.

사진=넷플릭스 공식 인스타그램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학교폭력을 피해자들의 연대로 확장한 점이다. 가정 폭력 피해자 강현남(엄혜란 분)과 살인 사건 피해자 유족 주여정(이도현 분)이 학교폭력의 피해자 문동은을 돕는다. 문동은과 강현남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은 이 삭막하고 차가운 안개 속에서 얼마 되지 않는 따스한 순간들이다. 폭력의 피해로 인해 복수만을 꿈꾸며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동은, 폭력의 피해자이지만 피해자성에 매몰되지 않고 명랑함을 지켜내는 현남의 모습은 동은에게 어떤 울림을 주지 않았을까? 현남이 동은과 달리 가해자-피해자의 완결적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딸의 존재로 설명된다.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현남에게는 아직 있으니까. 

아무도 아무것도 없던 동은에겐 선택의 여지도 삶의 의미도 없었고, 그래서 복수를 삶이자 생존의 의미로 선택할 수 밖에는 없었을 테다. 존재감 없던 남주 주여정이 어쩌면 문동은의 삶의 의미가 되어줬을 수도 있겠지만, 동은은 왕자가 아니라 망나니를 원했다. 연애 혹은 연대 사이 어딘가에서 백마 탄 왕자님은 말에서 내려 망나니가 되기로 서원했다. 도대체 그에겐 어떤 과거가 있었을까. 손명오를 죽인 인물은 누굴까. 사라진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동은과 함께 칼춤을 추기로 한 주여정, 딸을 미국으로 보낸 강현남, 완연한 가해자의 입장에 선 문동은.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복수의 끝에 어떤 삶의 이유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더 글로리> part2에 답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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