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설명하는 건 일상의 조용한 순간들이다, 영화 ‘애프터 양’ [리뷰]
코고나다 감독 연출 ‘애프터 양’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되며 눈길 OTT 왓챠 배급 및 독점 공개
누구나 한 번 쯤은 전원을 탁 끄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내가 원하는 순간 다시 전원을 켜서 나올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결국 마음을 켜두고 싶다는 점에서 완전한 소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과연 존재는 작동을 멈추는 순간 소멸하는 걸까, 마음이 꺼지는 순간 소멸하는 걸까?
영화 ‘애프터 양’은 작동을 멈춘 존재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애플TV+ ‘파친코’를 통해 낯선 땅에 정착한 이방인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조명한 코고나다 감독은 ‘애프터 양’을 통해 다시 한 번 존재와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번 영화를 통해 ‘기억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알렉산더 와인스틴의 단편소설 ‘양과의 작별’을 원작으로 한 ‘애프터 양’은 목적과 용도에 따라 만들어진 기계 인간, 복제인간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삶에 뒤섞여 살고 있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SF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설정 외엔 현재 우리의 삶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스스로 운전해 달리는 자동차 정도가 있을 뿐이다.
백인 아빠, 흑인 엄마, 아시아인 남매. 언뜻 어색해 보이는 이들이 ‘가족 댄스 대회’에 참가한다. 3단계에서 탈락한 이들 가족은 서로 네 탓을 외치지만 계속해서 춤에 집중하고 있는 아들 양(저스틴 H. 민 분)에겐 아무도 “네 탓”을 외치지 않는다. 이들 가족에겐 ‘양은 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라도 있는 걸까. 춤 삼매경에 빠진 양을 다그쳐 부르며 이 가족의 현재는 멈춘다. 작별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다음날 아침 소파에 누운 양을 두고 “빨리 고치자”는 대화가 오간다. 남편 제이크(콜린 파렐 분)는 양을 병원이 아닌 구입처로, 공인 분석가에게로, 그리고 이웃에게 소개받은 기술자에게 차례로 데리고 간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진단은 “이건 ‘중심부’의 문제고 다시 켤 수는 없을 것”이란 비보다. 움직이고 말하고 춤추는 중국인 로봇 양 대신 가족의 손에 쥐어진 건 손가락 크기의 작은 부품에 담긴 그의 기억이다.
양의 기억을 되짚기 위해 장치에 접속한 가족은 거대한 우주를 마주하게 된다. 매일 몇 초씩 기록된 그의 기억은 별을 닮았다. 양에게 빛나는 기억은 충격이 가해지면 저장되는 차량용 블랙박스와는 다르게 아주 조용하고 정적인 순간들이다. 그리고 그런 양의 기억 속에서 한 여자를 본 제이크는 “안드로이드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엄마인 키라(조디 터너 스미스 분)의 기억 속에 양은 나비를 수집하는 취향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신은 풀밭을 지나는 개구리, 동생과 함께 본 무지개, 먹다 남은 디저트 접시를 본 장면을 기억 속에 고스란히 저장했다. 결국 양이 사랑한 건 가족과 함께한 모든 평온한 순간들이었다.
한편, 단순 리퍼 제품인 줄 알았던 양의 기억을 되짚던 가족들은 오랜 시간에 걸친 또 하나의 ‘기억 묶음’이 있음을 발견한다. 언젠가 양이 “제게도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장소와 시간에 관한 것들이요”라고 한 말은 진실이었다.
기억 속에서 양 자신은 항상 가족의 바깥에 서 있다. 카메라가 자신의 모습을 찍지 못하는 것처럼, 카메라의 정면이 아닌 뒤에 서서 가족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반면 그 자신은 거울 앞에 홀로 선 모습을 기억에 담았다. 그는 결국 자신을 마지막까지 관찰자이자 이방인으로 남겨두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그나마 양에게 정체성을 찾아 쥐여주는 건 그를 만든 회사도, 기술자도 아닌 동생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 분)다. 영화 내내 양을 부르는 호칭을 ‘꺼거(哥哥, 오빠)’라고 부르는 것 외에는 모두 영어로 대화하던 미카. 아이는 로봇 오빠와의 이별이 다가왔음을 직감하자 그간의 미안함과 고마움에 대해 읊조린다. 미카의 작별인사는 평소와 같은 영어가 아닌, 중국어였다.
가족들, 특히 딸 미카를 제외한 부부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는 켜지지 않을 것”이란 말과 함께 양을 잃는 과정에서 그를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키라의 기억 속 양이 “끝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저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모습은 아주 이른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은 모두 한국계 미국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양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로봇으로 등장한다. 감독은 이에 대해 많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서로 다른 뿌리를 가졌음에도 서구 땅에서 아시아인으로 묶여 분류되는 것을 꼬집었다. 이어 “아무도 그가 중국인 로봇을 연기하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 한다”며 이런 부분을 건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실제 영화에서도 고추장이 언급되는 등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 문화가 뒤섞여 등장한다. 때문에 감독이 전하려는 이야기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아시아의 관객들이다.
만약 ‘파친코’를 본 시청자라면 거기서 주인공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쌀밥이 등장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감독은 “음식은 지식적 차원 이상의 것을 전달할 수 있다”며 ‘애프터 양’에서도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음식을 전면에 내세웠다. 바로 차(茶)다. 차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각자의 정체성을 가늠해보는 것도 ‘애프터 양’을 폭넓게 누리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애프터 양’은 제74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제37회 선댄스 영화제에선 ‘알프레드 P. 슬로안 상’을 받으며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공개와 동시에 해외 평단으로부터 “인생만큼 광활하고 풍성한 영화”, “당신의 영혼을 위한 위로”, “‘인간의 의미’에 대한 핵심을 관통한다” 등 극찬이 쏟아졌다.
이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애프터 양’은 예매 시작 불과 3분 만에 전석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국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이어 6월 극장 개봉에선 상영관이 많지 않았음에도 이른바 ‘양떼’라는 팬덤을 탄생시키며 국내 팬들의 사랑도 놓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부터는 OTT 왓챠를 통해서도 서비스되며 몇 주째 인기작 TOP10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특히 8일 기준 왓챠 TOP10 가운데 무려 다섯 작품이 ‘탑건’, ‘범죄도시’, ‘공조’ 등 범죄나 액션 영화인 점을 감안하면 ‘애프터 양’은 잔잔한 휴식과 생각의 시간을 선물해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나 다운 것’ 또는 ‘인간다운 것’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관객이라면, 영화 ‘애프터 양’은 조심스럽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준다. 존재를 정의하는 건 그를 둘러싼 평범하고 정적인 순간들이 모여서 된다는 사실. 덥고 습한 여름, 영화를 보는 내내 숲을 거닐며 맨발로 시원한 흙을 밟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