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 [리뷰]
2014년 3월, 네덜란드 로테르담 동물원. 침대에 누운 한 남성에게 기린들이 다가간다. 남성을 향해 몸을 낮춘 기린들은 가만히 그와 얼굴을 맞댄다. 남성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침대에 누운 남성은 이 동물원에서 25년간 일한 직원이다. 뇌종양으로 죽음을 앞둔 그의 마지막 소원은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고, 앰뷸런스 위시파운데이션(소원 들어주기 재단)의 도움으로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 소개할 드라마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은 앰뷸런스 위시파운데이션의 감동 실화에서 탄생했다.
매주 수목 밤 KBS2에서 방영되는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은 첫 방송에서 3.6%의 시청률을 기록한 후 줄곧 2% 대의 높지 않은 시청률을 보이며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본방송 직후 OTT 웨이브를 통해 스트리밍되며 웨이브 인기 순위 10위 내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감독은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며 힐링 드라마를 예고했다.
주인공 윤겨레(지창욱 분)는 시작부터 누군가에게 쫓긴다.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 반려견 아들이를 맡겨둔 동물병원에는 강아지만 부탁한 게 아니라 출처가 불분명한 돈까지 맡겨둔 모양이다. 강아지와 함께 바다로 향하던 겨레는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피해차량 가운데는 환자가 타고 있는 응급차도 있었다. 사고로 다리를 다쳤으니 대신 운전하라는 구급차 운전사 강 반장(성동일 분)과의 유쾌하지 않은 첫 만남이다. 각기 다른 이유로 바다를 찾은 이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다며 바다에 뛰어드는 겨레를 붙잡은 건 강 반장이다.
이후 겨레는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호스피스 병원을 찾는다. 이곳에서 다시 만난 강 반장을 대신해 겨레는 운전을 하며 ‘팀 지니’에 대해 알게 된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들. 취지는 좋지만 보는 이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전에 살던 집에 가서 임종을 맞고 싶다는 소원을 위해 지금 살고 있는 가족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귀찮게 하는가 하면, 인기 배우와의 뮤지컬 공연이 꿈이라는 소원을 위해 오디션 현장에서도 떼를 쓴다. 환자들에게 자꾸 마지막을 상기시키며 무리한 활동을 부추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선생(신주환 분)의 말에 더 공감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팀 지니의 도움으로 소원을 이룬 이들은 고통보단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아직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버거운 겨레와는 달리 연주(최수영 분)를 비롯한 병원 식구들은 조금 덤덤한 모습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호스피스를 마냥 죽음을 기다리는 어둡고 암울한 공간으로 그리기 보다는 활기찬 사람들이 삶을 이어나가는 밝은 공간으로 묘사했다.
배우들과 제작진은 드라마의 준비 단계부터 실제 의료진을 찾아가 오랜 인터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 속 호스피스 사람들은 죽음이 마냥 두렵고 슬픈 일이 아닌,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 인사를 건네고 옆에서 손 잡아주는 것으로 충분한 일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죽음을 앞둔 젊은 환자의 입을 빌려 “결국 모든 사람은 시한부”라고 말하며 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한다.
환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밀어두었던 팀 지니의 이야기도 시작된다. 병원 식구들의 맛있는 밥을 책임지던 염 여사(양희경 분)는 바로 이 병원에서 아픈 딸을 떠나 보냈고, 강 반장 역시 이곳에 처음 올 땐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였던 것. 연주는 아픈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강해지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이렇게 저마다의 아픈 사연으로 한데 모인 팀 지니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하며, 또는 가족을 잃은 후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을 위해 팀 지니의 일원이 됐다.
16부작으로 기획된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은 현재 8회까지 방영됐다. 가장 최근 방영된 8회에선 겨레와 연주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한 가운데, 겨레에게 집착하는 보육원 동생 준경이 등장하며 방금 시작된 겨레와 연주의 사랑에 위기가 예고됐다. 또 실마리만 던져졌던 겨레와 강 반장의 관계는 이제부터 서서히 실체를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의 서사가 친절하지 않은 작품을 좋아하는 시청자는 드물다. 드라마는 1회에서 강 반장과 겨레의 사연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놓고 6회까지는 환자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6회를 모두 끌어가기엔 에피소드의 힘이 다소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환자나 가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보다는 그 소원을 이뤄주기 위한 팀 지니의 노력에만 집중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무송, 김신록, 박진주, 민우혁 등 연기파 배우들의 특별 출연을 활용하는 방식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드라마는 영화와는 다르게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시청자의 중도 진입이라는 이점이 있지만 중도 이탈이라는 위기 역시 생각해야 한다. 1회에서 던져진 실마리가 8회가 될 때까지 풀리지 않으면 실마리를 따라오던 시청자들은 하차를 선언하게 될 수 있고, 9회부터 진입하는 시청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진실에 거부감이 들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조금 늦게나마 시작된 팀 지니의 이야기는 눈물나게 슬프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친절하다. 작품의 초반에 환자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시간으로 6회를 소비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팀원들의 이야기는 짧지만 묵직하다. 그중에서도 항상 해맑은 최 여사와 묵묵한 황 영감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 다뤄졌지만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으며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주인공 겨레가 호스피스로 와 사회봉사를 위한 교육 첫 시간에 한 일은 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라곤 엿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한 내용에, 자신의 인생이 “참 별로였다”고 말하던 그는 팀 지니와 함께하며 유서를 한 줄씩 고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겨레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행복을 찾아간다.
초반 6회까지가 지루한 감이 있다면, 아주 살짝 빠른 속도로 재생해 보자. 어느 순간 겨레와 팀 지니를 응원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엔 모두 겨레와 같은 어른아이가 자리하고 있기에, 그리고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팀 지니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