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흑역사라면 얼마든지, ‘20세기 소녀’ [리뷰]

사랑에 시간차가 존재했던 때가 있었다. 시작하는 연인들의 발걸음은 자주 엇갈렸지만, 그게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늘 한 박자 느린 의사소통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상대를 향한 말들이 더 신중하게 다듬어지는 가치 있는 순간이었다.

사진=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는 엇갈린 순간들과 서툰 감정표현 탓에 흑역사로만 기억되는 첫사랑의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감독은 우연한 기회에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썼던 교환일기를 꺼냈고, 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첫사랑 남학생을 마주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첫 장편 영화에 도전한 방우리 감독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분들에게 선물 같은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1999년의 어느 날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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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인공 보라(김유정 분)의 가장 친한 친구 연두(노윤서 분)가 아픈 심장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눈에 반한 남학생이 있어서 미국에 가기 싫다는 연두를 위해 보라는 사랑의 큐피트를 자처한다. “걔 이름은 백현진. 키는 181cm, 발 사이즈는 280mm. 좋아하는 음료는 데미소다. 농구 좋아하고, 항상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어.” 보라는 현진(박정우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연두에게 메일을 쓴다.

보라는 현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의 단짝 친구 운호(변우석 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방송부 활동을 하는 보라와 운호는 그렇게 현진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운호는 현진을 향한 보라의 관심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보라는 얼버무리고 만다.

경주로 떠난 수학여행. 몰래 마신 술에 잔뜩 취한 보라는 운호의 방 문을 두드린다. 이날 이후 보라와 운호는 현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정식으로 첫 데이트를 앞둔 어느 날, 연두가 수술을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보라는 연두가 첫눈에 반했던 남학생이 현진이 아니라 운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세상 어떤 것보다 우정이 중요했던 보라는 이대로 사랑을 놓치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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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라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보라의 우정과 사랑 외에 다른 이야기는 없다. 주인공의 로맨스를 위해 누군가는 거부당한 고백에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 애정을 표현하고, 누군가는 잠깐 고개를 들었던 질투심을 재빨리 버리고 메인 커플의 사랑을 응원한다. 이렇게 싱겁게 해결되는 갈등 탓에 영화는 “많은 첫사랑 영화가 그렇듯 클리셰의 연속이다”는 혹평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는 보라 외에 다른 캐릭터들의 서사가 다소 부족했던 탓일 수 있다. 유일하게 운호에게 나름의 가정사를 부여했지만, 보라와의 로맨스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장치 이상의 서사는 가지지 못했다. 연두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사랑보다 우정에 더 가치를 두는 인물이고, 보라가 연두를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도록 연두에겐 몸이 약하다는 설정이 더해졌다. 현진은 보라에게 대차게 거절당한 후에도 든든한 친구로 곁을 지킬 뿐, 그의 이야기는 어떤 것도 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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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밋밋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 덕분에 보라와 운호의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20세기 소녀>가 가진 매력이다. 클리셰는 많은 이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수없이 반복되는 거다. 보라의 시선을 따르는 게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친근한 연기를 보여준 김유정은 물론, 우정에서 사랑으로 옮겨가는 섬세한 감정을 소화해낸 변우석의 연기 역시 이 진부한 첫사랑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라의 회상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운호와 함께했던 과거의 순간들은 따스한 필터를 장착해 아련하게 표현된다. 자두나무 아래 함께했던 두 사람, 처마 아래 나란히 앉아 내리는 비에 발끝이 젖어가던 순간, 헤어짐을 앞두고 숨겨왔던 감정을 마구 쏟아내던 기차역은 이 ‘아련 필터’ 덕분에 더 꿈같다.

이제는 거의 만날 수 없는 것들의 등장은 반가움을 더한다. VHS 테이프, 삐삐, 공중전화, 그리고 연인의 발걸음이 엇갈렸던 순간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수많은 첫사랑 이야기가 ‘그래도 그땐 낭만이 있었지’로 끝나듯, 영화는 그 엇갈림의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회상한다. 사랑에 시간차가 있던 시절, 소통은 어려운 만큼 더 가치 있고 특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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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메신저가 멈췄던 몇 시간 사이에 모든 일상이 흔들린 오늘과는 다르게 그날의 연인들은 엇갈린 발걸음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공중전화의 동전이 다 떨어지기 전에 필요한 말을 전하기 위해, 하고 싶은 말 중에서 꼭 해야 할 말만을 걸러내는 과정을 거듭할 뿐이었다. 그렇게 정제해서 건넨 말이지만, 언제나 후회는 남는다. 잠 못 드는 밤, 이불 속에서 발차기를 하게 만든 서툰 표현들. 우린 그걸 ‘흑역사’라고 부른다. 영화는 그 흑역사를 쓰기까지 혼자 고민했던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학창 시절의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만큼, 보라와 운호는 시종일관 수줍고 순수하다. 그들의 로맨스는 껴안거나 입 맞추지 않아도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이 있다. 두 사람이 그저 마주보고 있거나 용기내 손을 잡는 정도로도 우리는 그들의 요동치는 마음을 함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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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극장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특유의 색감과 영상미를 자랑했다. 관객들은 “첫사랑 처럼 예쁜 영화”라는 평가를 내놨다. <20세기 소녀>의 매력은 스크린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했던 VHS 테이프를 보던 때의 감성을 되살려보자. 적당한 크기의 TV를 통해 재생시켜 놓고 한 손엔 퍼먹는 아이스크림을, 한 손엔 스푼을 들고 반쯤 누운 자세로 즐기는 거다. 조금은 진부하게 느껴지는 캐릭터들일 수는 있어도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리는 과거와 옛사랑이라면, 기꺼이 그날의 흑역사를 떠올리는 것도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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