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걸린 한국 영화, “사상 최악의 위기”
2023년 1분기 韓 영화 산업 사상 최악의 성적 “영화 한편 볼 바엔 OTT 한 달 구독하는 게 효율적” OTT 시장 규모 확대가 영화 업계의 위기 요인?
한국 영화의 연이은 흥행 참패. OTT 플랫폼의 성장이 원인일까?
지난 18일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3월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3월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전체 관객의 26.8%(187만명), 매출액 점유율은 25.1%(215억원)이다. 이는 팬데믹의 영향으로 침체기를 맞이했던 2020년부터 2022년을 제외하고 2004년 이후로 가장 저조한 수치다.
3월뿐만이 아니다. 2023년 1분기 한국 영화의 매출액은 789억원. 팬데믹 이전인 2019년 1분기 매출액(2,994억)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올해 개봉한 주요 한국 영화의 성적을 보면 참혹한 수준이다. 1분기 개봉한 주요 한국 영화 7편 모두 손익분기점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고, 100만 관객을 넘긴 작품은 현빈-황정민 주연의 <교섭>(172만)에 불과했다. 대작으로 주목받던 이하늬-설경구 주연의 <유령>, 이성민-조진웅-김무열 주연의 <대외비> 또한 각각 66만, 75만 관객에 그쳤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같은 시기에는 9편의 한국 영화가 100만 관객 수를 넘겼고, 그중 5편은 200만 관객을 넘기기도 했다.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등 한국 영화의 정점을 찍었던 2019년과 지금의 영화계를 단순 비교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 분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가 모두 수익을 내지 못한 것은 사상 최악의 기록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이대로 라면 내년 하반기에는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한국 영화를 보기도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팬데믹이 끝났지만 회생은커녕 되려 최악의 성적을 달성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반면 외국 영화의 매출액은 2019년 1,683억원에서 2023년 1,933억으로 팬데믹 이전의 수치를 넘어섰다. 지난 2022년 12월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 이외에도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과 <존 윅4>의 ‘대흥행’ 덕분이다.
한국 영화의 연이은 흥행 실패 속 외국 주요 작품들은 ‘기록 세우기’ 중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물의 길>은 전 세계 박스오피스 3위에 올라섰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은 역대 국내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왕좌를 두고 다퉜다. 개봉 2주차를 향해 가는 <존 윅4>는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임에도 벌써 12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극장을 찾지 않는 이유로 관객들은 ‘과도하게 오른 티켓값’을 꼽았다. 팬데믹으로 직격탄을 맞은 극장들이 줄줄이 가격을 인상한 것. 영화업계에 따르면 영화 티켓값은 평일 낮 일반관의 가격은 1만 4,000원, 주말 낮에는 1만 5,000원, 특별관은 2만원에 달한다. 팬데믹 이전과 비교하면 4,000원 이상 인상됐고, 팬데믹의 영향권이던 2020년에 비해서도 2,000원 이상 올랐다.
대중들은 “영화 티켓값이 부담된다. 화면 크기만 신경 안 쓴다면 집에서 편하게 보는 게 좀 더 좋다”, “제값 주고 보기 아깝다. 할인이 없으면 보기 어렵다” 등 티켓값 인상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이에 대해 “급격히 오른 티켓 가격이 알게 모르게 소비자의 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화 티켓값의 인상은 관객들을 OTT로 모았다. 1만원을 훌쩍 넘는 티켓값을 내고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보다 한 달치 OTT 사용료를 내고 집에서 편하게 여러 콘텐츠를 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OTT 시장의 규모는 매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의 가입자 정체와 디즈니+의 대규모 적자로 인한 구조조정, 토종 OTT인 티빙과 웨이브의 늘어나는 적자 규모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2012년 1,085억에 그치던 OTT 시장 규모는 2021년 1조원을 넘기며 10배가 넘게 확대됐다.
영화 업계에서는 극장 관객들의 콘텐츠 소비가 OTT로 분산되면서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지난 5일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는 CGV 골든에그 지수 98%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 호평을 받으며 입소문을 탔음에도 개봉 3주차 관객 수가 50만명 수준이다. 이 기록을 유지한다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는 어렵다.
스크린 독과점과 홀드백(극장 상영 뒤 VOD나 OTT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기까지의 기간)이 짧아진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영화 업계에서는 영화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이 문제들이 OTT와의 경쟁 심화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영화 업계가 산업의 지렛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넷플릭스와 같은 OTT들이 절대 갑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업계를 되살리려면 제도를 정비하고 제작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만드는 등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의 잇다른 흥행 실패에 개봉일을 확정하지 못한 한국 영화 개봉 대기작은 90여 편에 이른다. 극장의 최고 성수기인 여름에 개봉 일정을 잡은 것은 류승완 감독의 <밀수>(7월 26일 개봉)가 유일하다. 유명 배우나 감독만으로 흥행을 예상하기 어려워진 데다 OTT로 관객을 뺏기면서 개봉 일정을 확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내 최대 투자배급사인 CJ ENM 관계자는 “팬데믹 이전에는 개봉 데이터를 통해 구체적인 목표를 잡고 개봉 일정을 조율했다. 지금은 관객 수 예측이 사실상 어렵다”고 밝혔다.
영화 업계에선 지금보다 2, 3년 후가 더 큰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OTT 플랫폼 등으로 투자가 분산되면서 새로운 영화 촬영이 어려워지면서 개봉 대기작들이 모두 개봉되고 나면 극장에 올릴 한국 영화가 없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 기획에서 개봉까지 보통 2~3년이 걸리는데, 지금 대처하지 않으면 국내 극장에는 외화나 저예산 한국 영화밖에 상영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