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클레오파트라, 인종차별인가 블랙 워싱인가? [리뷰]
넷플릭스 ‘퀸 클레오파트라’ 블랙 워싱 논란 역사 왜곡 논란에 평가 참혹 다큐-드라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가벼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드라마 <퀸 클레오파트라>(Queen Cleopatra)가 지난 10일 넷플릭스(Netflix)에 공개됐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로마의 두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인으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다룬 창작물은 많았지만, 이 드라마는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묘사하며 논란이 됐다.
티나 가라비, 빅토리아 아돌라 토머스 감독이 연출한 <퀸 클레오파트라>의 타이틀롤은 영국 출신 혼혈 배우 아델 제임스(Adele James)가 맡았다. 작품은 공개 나흘 만에 누적 시청 시간 2,018만 시간을 기록하며 TV(영어권) 부문 글로벌 7위에 올랐지만,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다. 콘텐츠 평가 사이트 IMDb 점수는 10점 만점에 1점, 로튼토마토 관객 평가는 3%에 불과하며 메타스코어 역시 45점으로 저조하다.
흑인 클레오파트라 ‘상상’한 다큐멘터리 드라마
드라마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의문을 던지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후 ‘다큐멘터리 드라마’답게 내레이션과 전문가 인터뷰, 배우의 재연 장면이 번갈아 나오며 클레오파트라의 삶이 그려진다.
미국 해밀턴 대학의 아프리카학 교수 셸리 헤일리는 드라마 초반 인터뷰에서 자신의 할머니가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었다”라고 이야기한 기억이 생생하다며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처럼 옅은 갈색 피부와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상상’한다고 말했다. 티나 가라비(Tina Gharavi) 감독은 기고문을 통해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조상으로부터 8세대나 떨어져 있다며 그녀가 흑인 혼혈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변할 수 있다. 숨겨져 있던 기록이 나타나거나,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거나, 과학이 발전해 새로운 연구 방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되거나, 가능성은 다양하다. 하지만 변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기존 정설을 뒤엎을 만큼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집트 관광청은 드라마 예고편이 공개되자 클레오파트라가 “밝은 피부와 그리스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냈다. 저명한 역사학자들의 저술, 이집트 왕가가 근친혼을 계속했다는 점,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와 뼈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 결과, 조각상이나 벽화 등이 근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드라마에는 어떤 명확한 데이터나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라는 추측에 불과한 것. 드라마에 등장한 ‘전문가’들은 분야의 권위자가 아닌 흑인 클레오파트라의 ‘팬’처럼 비춰진다.
진지함도 재미도 실패,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퀸 클레오파트라>는 진지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되기에는 가볍고, 사극 장르로 묶기에는 극적 요소가 부족한 작품이다. 아델 제임스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다른 배우들은 일일연속극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재연 장면이 나올 때 전문가가 끼어드는 것도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했다. 진주를 식초에 녹여서 마셨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클레오파트라인데, 배우의 머리 스타일이나 메이크업은 그에 걸맞은 화려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넷플릭스는 퀸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그간 할리우드가 무시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유산’을 재평가하겠다고 했지만, 기존의 창작물이 따르던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부분이 여전히 클레오파트라의 연애사에 할애됐으며 클레오파트라는 다른 여성과 어떤 점이 달랐을 테니 두 영웅이 빠져들었을 것이라는 주장, 심지어는 그녀의 성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대목까지 등장했다. 작품에 등장한 클레오파트라의 ‘결단’은 대부분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인종 논란을 제외하더라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다.
소송전으로 번진 <퀸 클레오파트라>, 무엇을 얻었는가?
이집트 출신 변호사 마흐무드 알-세마리(Mahmoud al-Semary)는 넷플릭스가 “이집트의 정체성을 지웠다”라며 넷플릭스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집트의 공영 방송사 측은 “철저한 자료 조사와 고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진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델 제임스는 드라마의 인종 논란을 두고 “캐스팅이 싫다면 드라마를 보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집트인들의 반응이 인종차별적이라고 이야기했고, 인스타그램에는 자신을 닮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세계 최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흑인 혼혈 여성이 연기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를 보며 성장할 것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정치적 올바름(PC), 그중에서도 인종차별에 대응하기 위한 요소가 들어가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다. 마블 영화에서는 실제 만화에서 흑인이 아니었던 등장인물이 흑인으로 나오기도 했고, 최근에는 흑인 인어공주가 크게 이슈화됐다.
창작물이 100% 픽션이라면 이런 논란은 그렇게 심각하게 번지지 않을 수 있다. 등장인물이 자신의 상상과 다르다는 관객의 불만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상상’과 다른 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이 드라마에 ‘다큐멘터리’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물론 일부 “캐릭터와 장면이 각색되었다”라는 내용이 크레딧에 포함됐지만 그건 그저 면책 조항에 불과하다.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은 여전히 클레오파트라가 정말 흑인이었을 거라고 굳게 믿고, 그런 생각을 열심히 드러내고 있다.
<퀸 클레오파트라>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역사계의 흑인 차별을 해결하겠다며 클레오파트라 흑인설을 주장했지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여성이라 무시된 클레오파트라의 영웅적 면모에 주목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고증을 무시하면서 볼 정도로 눈이 즐겁거나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지도 않다.
인종차별, 여전히 전 세계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문제이자 풀어야 할 숙제다. 이를 위한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역사 왜곡, 그것도 다른 나라의 역사를 입맛에 맞게 바꾼 창작물을 ‘다큐멘터리’로 포장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예정일(10일) 보다 늦게 <퀸 클레오파트라>가 공개됐다. 넷플릭스 측은 ‘국내 등급 심사 과정’을 이유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