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스타] 이야기를 빛내는 배우 김태리

‘악귀’로 인생 첫 악역 도전한 김태리 힐링·로코·SF·오컬트 ‘전 장르 올킬’ 한 번에 한 작품, 천천히 꼭꼭 씹어 삼킨 캐릭터 소화력

사진=SBS

차디찬 현실 앞에서의 막막함, 가진 자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나만 정체된 듯한 조바심, 귀신보다 무서운 사람들, 그럼에도 다시 ‘살아가겠다’ 다짐하는 강인함. <악귀> 속 김태리의 모습에서 청춘을 본다.

SBS 금토극 <악귀>는 정체불명의 악귀에 씐 여자와 그 악귀를 볼 수 있는 남자가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 한국형 오컬트 미스터리 드라마다. 이번 작품에서 김태리는 악귀에 씐 여자 주인공 구산영으로 분해 선악을 오가는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악귀>는 오늘(21일) [오늘의 OTT 통합 랭킹] 1위를 기록하는 등 방영 내내 뜨거운 열기를 이어오고 있다.

김태리는 이번 작품으로 배우 인생 첫 악역에 도전했다. 내가 아닌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라지만, 현실에 없는 초자연적 존재를 표현해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터. 이달 6일 공개된 SBS 공식 유튜브 채널의 코멘터리 영상에서 김태리는 <악귀> 대본을 처음 받아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대본을 받을 때마다 질문이 많게는 100개씩 생기곤 했다”는 그는 작가와 감독, 동료 배우들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한 정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김태리는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에 만족하지 않았다. “배움은 누가 챙겨주는 게 아니라 내가 훔쳐 먹는 것”이라는 자신의 명언을 곱씹으며 조금씩 자신만의 악귀를 완성해 갔다. 극 중 산영은 깊은 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신을 차릴 정도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귀에 잠식당하는 인물이다. 악이 물러나고 선을 되찾는 이 찰나의 순간을 표현해내야 하는 김태리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길지 않다. 길면 몇 분, 짧으면 몇 초 사이에 달라지는 그의 정체성은 올라갔던 한쪽 입꼬리를 살며시 내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직됐던 피부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뒤틀렸던 입술은 바짝바짝 마른다. 어색하게 뻗어 있던 목과 어깨가 아주 살짝 움츠러드는 듯하면서 눈에 가득했던 독기가 사라진다. 이 모든 게 원 테이크에 담긴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 천생 배우다.

사진=SBS

배우가 아닌 김태리를 상상하기 어려운 지금이지만, 처음 연기에 흥미를 느낀 건 다소 늦은 대학생 때였다고. 우연히 들어간 연극 동아리에서 처음 느낀 무대의 열기와 관객들의 열띤 응원은 김태리가 배우의 꿈을 꾸는 원동력이 됐다. ‘1,500대 1’이라는 강렬한 수식어 탓에 많은 사람이 영화 <아가씨>로 혜성처럼 나타난 줄 알지만, 김태리는 대학 연극 동아리부터 극단 스태프, 단역, 단편영화 주·조연과 각종 광고로 차분히 단계를 밟아 온 ‘성장형 배우’다.

물론 영화 <아가씨>에서 보여준 김태리의 잠재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 숙희는 귀족 아가씨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하녀로 접근했다가 아가씨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입체적인 인물로, 영화의 전반부를 혼자 끌고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짙어진 동성애 코드와 선정성 등으로 호불호가 갈렸지만, 김태리는 김해숙, 조진웅, 하정우, 김민희 등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 사이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해 청룡영화상, 부일영화상, 아시안 필름 어워드 등 국내외 주요 시상식에서는 신인상 부문 차례마다 김태리의 이름이 호명됐다.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받을 수 없어 더 특별하다는 신인상 트로피를 휩쓴 만큼 이 놀라운 신인 배우에게 쏟아지는 충무로의 관심은 엄청났다. 쏟아지는 캐스팅 속에서 김태리가 차기작으로 택한 작품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였다. 자연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사계절의 변화를 빠짐없이 담아낸 이 영화는 촬영에만 꼬박 1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때 지방의 촬영지에서 보낸 사계절은 김태리에게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됐다. 그는 이 작품에서 과장하지 않고, 채우기보다는 덜어내는 법을 배우며 내면이 단단한 배우가 됐다. 소박한 시골 풍경과 정갈한 음식, 나지막이 흐르는 김태리의 내레이션, 애써 채우지 않고 비워둔 여백들은 영화를 보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게 한다.

사진=(왼쪽 위부터 시계방향)CJ ENM,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tvN, SBS, tvN, 넷플릭스

2018년 안방극장 공략에 나선 김태리는 tvN <미스터 션샤인>에서 명문가의 아기씨 고애신으로 분했다. 극 중 애신은 공식적으로는 조선 최고 명문가의 아기씨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무너져 가는 조선을 일으키기 위해 총을 든 의병이다. 격변의 구한말로 걸어 들어간 김태리는 고애신의 이름을 빌려 이름 없는 영웅들의 묵직한 항일투쟁사를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나아가 이 작품으로 강렬했던 <아가씨>의 잔상을 깨끗이 지워내며 장르와 캐릭터에 한계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후 한국 최초 우주 SF 영화 <승리호>에서는 늘 막말을 일삼는 안하무인 장선장을 단순하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캐릭터로 그려내 호평을 받았고, 2022년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는 고등학생 역할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캐릭터 소화력으로 풋풋한 청춘 로맨스를 완성했다.

다소 늦다고 여겨질 수 있는 데뷔와 주연 발탁에도 김태리는 욕심내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한 번에 한 작품, 캐릭터 하나하나 꼭꼭 씹어 소화하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성장했고,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에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덕분에 그의 출연작은 모든 작품에 대표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김태리가 출연한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많은 작품을 보는 재미만큼이나 하나의 작품을 깊이 보는 것도 즐겁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카메라 앞에 서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는 뻔한 말은 하지 않는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언젠가는 도망치고 싶어지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말로 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김태리는 촬영 틈틈이 휴식 대신 펜을 들어 그림을 그린다. 때론 매니저의 얼굴을, 때론 스태프의 얼굴을, 그리고 동료 배우의 얼굴을. 수준급의 캐리커처 실력이지만, 결코 자랑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작은 그림 한 장을 핑계 삼아 주변 사람들과 눈을 마주하는 게 어설픈 휴식보다 훨씬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식보다 진실이 우선이라고 믿는 사람, 사소하지만 진심을 담은 행동으로 촬영장을 밝히는 사람.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언제나 주저 없이 “좋은 배우”라고 답하는 김태리는 이미 더없이 좋은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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