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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저평가된 아시아 통화에 주목, 원화 반등 여력 커 인도네시아 루피아, 인도 루피, 대만달러 등 함께 거론 위안화 절상 막으려는 中에 추가 상승 어렵다는 분석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조치 이후 달러 강세가 한풀 꺾이면서 그간 저평가됐던 한국 원화와 대만달러, 인도네시아 루피아 등이 반등세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미국 자산의 비중을 조정하는 가운데,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 무역 협상에 대한 불확실성이 맞물리면서 글로벌 통화시장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양상이다. 다만 중국 정부의 위안화 안정화 조치 가능성, 미국의 금리 정책 방향 등 주요 변수들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이번 통화 강세가 지속적인 추세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아시아 주요 통화, 역사적 평균 대비 저평가"
12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은 "한때 가장 안정적인 통화로 평가받았던 아시아 주요 통화의 가치가 역사적 평균 대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며 "수년간 라틴아메리카 통화가 캐리 트레이드 대상으로 각광받는 사이, 아시아 통화는 이제 저렴함의 대명사가 됐다"고 보도했다. 실제 블룸버그가 국제결제은행(BIS)의 실질실효환율(REER)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한국 원화는 10년 이동평균 대비 가장 큰 폭으로 가치가 하락했다. 그 뒤를 이어 인도네이사 루피아, 브라질 헤알, 대만달러, 인도 루피 순으로 저평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골드만삭스그룹도 원화를 달러 자산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유망한 통화로 지목하며 인도네시아 루피아, 인도 루피, 남아공 랜드 등을 유망한 신흥국 통화로 꼽았다. 영국의 글로벌 금융그룹 바클레이즈 역시 원화와 더불어 싱가포르달러, 대만달러 등의 추가 상승 가능성에 주목했다. 블룸버그는 이 같은 전망에 대해 "달러 약세, 중국 경기 부양에 대한 기대감, 미국과 아시아 간 무역 협상 진전 가능성 등이 맞물리면서 아시아 통화의 매력이 재부상하고 있다"며 "아시아 통화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저렴해 수익 실현 여지가 크다"고 짚었다.
대만달러 급등에 아시아 주요 통화 동반 강세
실제로 이달 초 감지된 대만달러의 급등세가 인근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아시아 통화 전반이 강세 흐름을 타고 있다. 대만달러의 폭등(절상)은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단 2거래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지난 1일 종가 32.077대만달러였던 환율은 이틀 만에 8~9% 급락하며 장중 29.458대만달러까지 떨어졌다. 2일 하락률(절상률)은 4.15%로 1980년대 이후 하루 기준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6일부터는 일부 반락 조정이 있었으며, 현재 환율은 30대만달러 선에서 안정을 찾고 있다.
갑작스레 대만 달러가 강세를 보인 배경에는 미국과 관세 협상 중인 대만 정부가 통화가치 상승을 용인할 것이란 예상이 자리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때처럼 미국이 무역 적자를 상쇄하기 위해 상대국 통화가치를 상승시키려 할 것이라는 추측 속에 대만 수출 기업들이 달러 매도에 나서고 대만 달러를 사려는 자금이 유입되면서 대만 통화 강세를 부추긴 것이다. 대만은 미국의 6번째 무역 적자국으로, 미국은 32%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대만 협상단은 지난 1일 1차 협상을 진행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아 환율 합의에 대한 추측만 무성해졌다.
대만달러의 급등은 인근 아시아 신흥국 통화의 동반 강세를 촉진했다. 원화 역시 2일 2.5% 급등한 데 이어 5일 1.5% 추가 상승하면서 5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싱가포르달러도 절상 압력을 받았다. 중국 위안화도 연휴 뒤 거래가 다시 시작되면서 1달러에 7.23위안까지 올라 지난 3월 20일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엔화는 이 시기 한 차례 급등한 뒤 현재는 1달러에 143~144엔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호주달러는 지난 6일 5개월 만의 최고치(0.6449달러)에서 거래됐다.

美 자산 조정 흐름이 아시아 통화 강세에 영향
이러한 아시아 통화 강세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세계 무역 및 동맹 재편 움직임 속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미국 자산의 비중을 재조정하려는 흐름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대만달러의 급등 시점이 미국·대만 간 무역 협상 시기와 겹치면서 이 같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시아 각국의 대미 무역 협상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면서 아시아 통화에 대한 투자 심리도 점차 회복됐기 때문이다. 현재 블룸버그 아시아 통화 지수는 4월 저점 대비 약 3% 상승했고, 글로벌 자금이 인도네시아·태국·한국 등 아시아 통화 채권에 유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그동안 아시아 통화가 심각하게 저평가됐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는 타당하나, 해당 국가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부담이 될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예컨대 관광 부진에 시달리는 대만이 단기간에 10%의 평가절상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한국, 대만과 같이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국가의 경우, 정치적 요인이 통화 절상 압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 대만중앙은행은 시장 개입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대만달러 급등에 대해 당국의 묵시적 승인 가능성을 제기하며, 미국 역시 이를 환영할 수 있다는 분석이 많다.
다만 이번 상승세가 지속적인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위안화의 상대적 안정성이 아시아 통화 전반의 변동성을 낮추는 동시에 급격한 절상을 제한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90일 간의 관세 유예가 적용되지만, 미중 무엽혁상이 여전히 진행 중인 데다 중국 정부가 위안화 강세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 정책도 주요 변수다. 최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금리 인하에 신중한 입장을 밝히자, 달러가 반등하면서 아시아 통화가 상승폭을 일부 반납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