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에 체 게바라와 철학서적 입힌 기예르모 델 토로 [리뷰]
전체주의 비판적인 관점에서 다시 쓰인 피노키오 정치, 경제, 군사적인 압박을 상징하는 영화적 장치와 반발하는 목각 인형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을 선택하는 가족애는 원작에 충실하기도 철학 서적 수준의 논지가 숨겨진 ‘어른들의 영화’
우리가 알고 있는 피노키오는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는 나무 인형 이야기다. 멕시코 영화계의 거장 기예르모 델토로는 거짓말이 나쁘다는 어린 시절 동화책을 철학 서적으로 다시 썼다. 코가 길어지는 이야기는 양념으로만 쓰고,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남미 최고의 아이콘, 체 게바라를 피노키오 이야기에 입혀버렸다.
정치, 경제, 군사적 폭력에 대한 저항
목각 인형 제작자 제페토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마을 교회 사람들의 공포 섞인 표정은 피노키오의 특이성이 ‘인간’에 대한 개념에 저항받는 것에 대한 군중의 전체주의성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부분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개인일지 모르나, 집단이 된 마을 사람들의 공포심은 제페토와 피노키오에게 집단의 폭력을 행사한다. 인간의 규칙을 모르는 피노키오는 외부와 격리되거나, 학교라는 곳에서 인간의 규칙을 배워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학교를 거부하고 극단에서 돈벌이에 동원되는 피노키오의 모습은 자본주의에서 유아 노동력을 이용하는 또 다른 폭력을 보여준다. 극단을 이끄는 볼페 백작은 영화의 배경인 1900년대 초반 유아 노동력과 복지 수준에 대한 자본주의 기업가의 대표 이미지인 동시에 2020년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이기도 하다. 재능이 있으면 칭찬을 해 주고, 키워줘야 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더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고급 훈련을 받고 더 나은 복지를 찾기보다, 당장 기업가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부품이 되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속성에 대한 비판이 숨어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서민층에게 자본주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끌려가는 훈련은 군사적 폭력의 다른 모습이다. 정치적 권위의 상징인 시장이 원하는 대로 유소년 군사 캠프에 징집당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인 기계가 되는 훈련을 잘 받으면 칭찬을 받는다.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잘 받거나, 실제로 사람을 잘 죽이면 칭찬을 받고, 지위가 올라가고,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시장의 아들은 아버지의 요구를 따르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인간적인 연민으로 피노키오를 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나약함인지 인간성인지 알 수 없으나, 시장은 군사적 폭력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보이는 아들에게 크게 실망한다. 수능 시험 성적이 오르지 않는 자식에게 큰 실망을 하는 한국 부모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체주의보다 개인주의, 그리고 인간에 초점을 맞춘 영화
1900년대 초반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폭력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에 대한 묘사는 주인공 피노키오가 ‘어른들’의 요구조건을 따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무솔리니로 대변되는 전체주의가 원했던 프로파간다 홍보 연극은 ‘똥(Poop)’으로 노래 가사를 바꿔버린 피노키오의 반발에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린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대부분의 서민들은 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고,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불사신인 피노키오라면 못할 것도 없다.
불사신이라는 특성도 포기하고,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잃으면서까지 아버지를 구하려는 피노키오의 모습은 정치, 경제, 군사적 폭력에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가족을 지키려는 가족애, 즉 인간성이 목각인형 피노키오에게 완전히 녹아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무 요정은 단순히 ‘착한 아이(Good boy)’여서 피노키오를 회생시켜준 것이 아니라, 나무 조각에 불과했던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귀뚜라미 세바스티안의 요청을 들어줬을 것이다.
동화책이었나? 철학 서적이었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칼 포퍼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극소수만 선택받을 자격이 있다는 전체주의적인 관점을 반박하며, 일부 조건이라도 갖춘 존재들이 서로 협력하며 집단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반전체주의적인 관점,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전체주의 집단의 논리가 유럽을 지배하던 1944년에 쓰여진 이 책은 독일 제3제국이 전쟁에 참패한 1945년에야 출판을 준비해 1946년에 출판됐다. 델토로의 피노키오도 지구가 전체주의 세력의 도전에 휩싸여 있었으면 외부에 공개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될만큼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반박을 풀어낸다.
실제로 델토로 감독은 2008년부터 이 영화를 제작하고 싶었으나 모든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이 영화 제작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너무 동화스럽지 않아서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자본주의적인 관점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델토로 감독에게 또 하나의 전체주의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전체주의 군사 집단 탓에 출판이 지연되는 것과 자본주의 이익 논리 탓에 개봉이 지연되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피노키오라는 동화책 이야기니까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가족 영화였나? 피노키오 이야기로 위장한 체 게바라 이야기였다고 할까? 글쎄다. 대학 시절 힘겹게 읽었던 어느 현대 철학 서적만큼이나 피로감이 몰려오는 117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