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스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배우 정해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D.P.’ 안준호 役 정해인 멜로 장인에서 액션 장인으로, 불붙은 연기 자신감 “다시 못 올 순간, 중요한 건 지금”

사진=넷플릭스

대한민국 군대의 어두운 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가 2년여 만에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했다. 더 확장된 이야기, 더 화려해진 액션, 더 풍성해진 볼거리가 즐비한 가운데, 자세를 낮춘 채 가만히 읊조리는 정해인의 목소리에 가장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왜일까.

정해인이 연기한 <D.P.> 속 안준호는 암울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군에 입대한 인물이다. 그렇게 도피처로 삼은 곳이었지만, 군대는 준호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바깥과 전혀 다를 것이 없거나 심지어 더 암울하지까지 한 현실 앞에 준호는 종종 무기력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군무이탈체포조(D.P)가 되어 비교적 자유로운 외출이 가능해졌음에도 탈영병을 잡아 오는 본연의 임무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과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시즌엔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밝고 활기참과는 거리가 있지만, 준호는 주어진 임무 외에 ‘더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해야 할’ 그 일을 위해 준호는 D.P의 신분으로 탈영을 감행한다. 끊임없이 달리고, 동료였던 이들과의 거친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준호지만, 그의 분노와 고뇌, 결의가 느껴지는 순간들은 이런 강렬함과는 거리가 멀다.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설 때, 공중화장실 세면대에 우두커니 서서 코피를 훔칠 때, 쉬지 않고 휘몰아치는 이야기 중간중간 어쩌면 잠시 긴장을 풀기 위해 삽입된 여백의 순간들. 이런 멈춤과 고요의 순간에 섬세한 내면 연기로 나지막이 ‘진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안준호의 이름을 빌린 정해인이기에 가능했다.

지난달 28일 시즌2를 공개한 <D.P.>는 군대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깊은 공감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안기며 어제(7일)까지 [데일리 OTT 랭킹] 넷플릭스 차트 1위를 지키는 등 뜨거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넷플릭스, tvN, JTBC,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KBS2, CGV아트하우스, MBC

올해로 배우 10주년을 맞이한 정해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으로는 2017년 방영된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꼽힌다. 교도소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조금은 유머러스한 시각으로 담아내며 큰 인기를 끈 이 작품에서 정해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유정우 대위로 분했다. 극 중 유정우는 부하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는 군인이다. <D.P.>에 앞서 군인을 연기했던 정해인이지만, 그때는 군복 대신 죄수복을 입은 셈이다. 억울함에 대한 분노보다는 냉소로 가득했던 극 중 정우는 서부교도소 2상 6방 이른바 ‘어벤져스’와 어울리며 조금씩 웃음을 되찾는다. 교도소가 배경인 작품에서 다소 밋밋해 보이는 ‘누명 쓴 수용자’ 캐릭터는 정해인을 만나 철딱서니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청년으로 조금씩 바뀌어 나갔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한양(이규형 분)과 정우가 선보인 ‘톰과 제리 케미’는 많은 시청자가 꼽은 백미다.

이듬해에는 JTBC <밥 잘 사주는 누나>를 통해 첫 주연에 도전했다. 정해인이 연기한 극 중 준희는 완벽한 외모와 스펙을 자랑하는 이른바 ‘엄친아’이자 연애에 있어 무척 현실적인 인물이다. 당시만 해도 연기 경력이 길지 않았던 그였기에 드라마 방영 초반 정해인에게 쏟아진 평가는 다소 아쉽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주눅들 법도 했지만 정해인은 꿋꿋이 자신만의 캐릭터를 완성해 나갔고, 매회 성장하는 모습으로 작품의 성공을 이끌었다. 비록 드라마는 후반부로 갈수록 꽉 막힌 전개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청자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그 막대한 피로감을 무릅쓰고 보는 이유로 배우들의 호연을 꼽을 정도로 정해인의 눈부신 성장 속도가 돋보인 작품이다.

2019년에는 예능 나들이에도 나섰다. KBS2 <정해인의 걸어보고서>를 통해서다. 예능과 다큐멘터리의 묘한 접점에 있는 이 프로그램에서 정해인은 안내자가 아닌 동행자로서 뉴욕을 소개했다. 그는 직접 여행지를 선택하고, 현지 음식들을 맛보고, 절친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인간 정해인’의 모습으로 소탈함이라는 매력을 추가했다. 쉴 새 없이 걷고, 야무지게 식도락까지 즐겼지만, 정해인은 이때의 뉴욕 여행에 두고두고 아쉬움을 표했다. ‘언젠가 다시 올 기회가 있겠지’라는 생각에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물론, 이 여행을 기점으로 이후 밀려든 작품 제안과 때맞춰 터진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그에게서 시간과 여유를 빼앗은 탓이다. 다시는 미련과 아쉬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해인은 늘 ‘지금’과 ‘여기’에 집중한다.

사진=넷플릭스

짧게는 2시간의 영화, 길게는 2~30시간의 드라마 속에서 한 인물의 삶과 내면을 그려내야 하는 배우들에게는 모든 작품이 특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해인에게 <D.P.>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D.P.>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만났는데, ‘내가 이런 연기를 할 수 있구나’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작품”이라고 정의했다. ‘멜로’와 ‘연하남’으로 굳어질 뻔한 이미지에 대한 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군 복무 기간과 동일한 1년 6개월을 꼬박 한 작품에 쏟아낸 정해인의 노력은 ‘퍼스널 컬러가 <D.P.>’라는 찬사로 이어졌고, 그는 이제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차기작인 영화 <베테랑2>에서 극강의 빌런을 연기하는 것. 모든 순간이 눈부시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주 가끔 무기력할 것만 같은 정해인이 그려낼 빌런은 어떤 매력으로 다가올지 궁금증이 커진다.

작품을 하나씩 마칠 때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큰 만큼 연기를 오래 한 배우 선배들을 가장 존경한다는 정해인이다. 팬들 앞에 오래 서기 위해 건강 관리에 열심이라는 그는 정작 10년 뒤 어떤 연기를 하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는 “40대 아저씨를 연기하고 있지 않겠나”라는 다소 싱거운 답변을 내놨다. 힘주지 않고, 그저 시간과 함께 흘러가다 그때그때 주어지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때론 강렬하게 다가오는 밀물처럼, 때론 멀리서 손 흔드는 썰물처럼. 그렇게 바다와도 같이 내내 푸른 정해인의 내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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