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이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로초는 남의 불행 [리뷰]
넷플릭스 신작 ‘패러다이스’, 영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풀어낸 영화 ‘영생’, ‘수명 연장’ 이전에 행복감의 근원은 ‘젊음’과 ‘돈’에 있다는 관점 결국 한정된 자원을 강탈당한 이들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은 빼앗은 자의 몫
‘오래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과 ‘내 삶은 행복한가?’라는 질문 중 어느 쪽이 더 인생에서 중요한 질문일까?
독일 영화 <패러다이스>는 남의 젊음을 빼앗아 영생을 제공하는 기업과 그 기업에 인생을 빼앗긴 사람들의 도전을 담은 이야기다. 갑자기 집이 전소되면서 40년 인생을 담보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던 한 여성은 대출 상환 실패에 대한 대가로 40년 인생을 빼앗기고, 아내의 젊음이 영생을 제공하는 기업의 대표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에 분노한 남편이자 해당 기업의 직원이 대표의 딸을 납치해 아내의 젊음을 되찾으려 한다.
영원히 젊음을 누릴 수 있는 생명 공학 기술을 개발했다는 천재 연구자가 왜 늙은 모습으로 나올까 궁금한 것도 잠시, 특성이 맞는 사람의 젊음을 제공 받아야 한다는 한계점은 결국 누군가의 젊음을 앗아야 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클리셰(Cliche)’로 시청자를 이끈다. 자신이 열심히 영업해 키운 회사의 대표가 자기 아내의 젊음을 빼앗아 가기 위해 집을 일부러 방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어떤 감정에 사로잡힐까? 이기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대신 거꾸로 회사 대표에게서 아내의 젊음을 되찾아 오겠다고 납치, 협박을 서슴지 않는 남편의 열정도, 겁 없이 살인을 저지르며 자신의 젊음을 찾으려는 아내의 이기심까지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도 ‘젊음’이 목숨보다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행복의 핵심은 부(富)와 명예가 아닌 ‘젊음’
납치, 협박, 심지어 살인까지 거리낌 없이 저지를 만큼 ‘젊음’이 중요한가?
‘영생’과 ‘행복’과 ‘젊음’ 중 주인공의 선택은 ‘젊음’이었다. 설령 살인자가 되더라도, 남편을 잃더라도, 젊음만 되찾으면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납치, 협박을 저지르는 남편 정도는 젊음만 되찾으면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일까?
인간의 가장 큰 열망 중 하나인 영생의 문제를 풀어낸 어머니의 부(富)에도 젊음을 잃은 딸의 인생은 너무 괴롭다. 눈물 흘리며 괴로워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젊음을 빼앗아서라도 딸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18살인 이민자 집안 아들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15년의 젊음을 70만 유로(약 10억1,089만원)에 팔아야 하는 선택의 순간, 엄청난 고민에 사로잡힌다. 돈이 간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15년의 젊음을 놓치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만약 33살의 몸을 18살로 돌려준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용을 지불하려고 할까? 그 가격이 700만 유로(약 101억원)라면? 아니, 7천만 유로(약 1,011억원)로 인상된다면?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의 부를 갖춘 모든 사람이 그 비용을 지불하려고 나설 것이라는 가정이 영화 전반에 깔려있고, 시청자인 우리도 그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공감한다.
젊음의 대가는 비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젊음
배경이 기업이 아니라 전쟁터였다면 아마 젊음의 대가는 고액의 비용이 아니라 총과 무기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매개체를 이용해 전달이 되건 결국 ‘행복’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인 ‘젊음’은 다른 사람의 ‘젊음’을 강탈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관점, 효율성, 생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류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추가로 50년, 100년의 수명을 주고, 마약으로 자기 인생을 버리고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서는 ‘젊음’을 빼앗는 것이 더 맞는 선택이다. 자본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나,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미 삶을 반쯤 포기한 채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이들의 수명을 빼앗아 인류의 미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이들에게 ‘몰아주기’를 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
<패러다이스>의 배경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의 ‘젊음’을 대성공한 기업 대표라는 ‘권력’이 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은 제로섬, ‘행복’도 제로섬인가?
작품 속에서 ‘젊음’은 누군가 얻으면 다른 누군가는 잃게 되는 ‘제로섬(Zero-Sum)’이다. ‘젊음’이 ‘행복’의 핵심 가치인 만큼, ‘행복’도 제로섬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젊음’ 이외에 다른 행복의 요소들도 제로섬일까?”라는 의문이다.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 시스템에서는 ‘행복’은 필연적으로 제로섬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남편은 자신의 수명 영업 업무를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의 일부’라고 표현했지만, 핵심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에 있다. 인류는 노동력을 공급해 한정된 자원을 구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해 왔고,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의 특징에 있어 자본력이 노동력만큼이나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만 다를 뿐, 결국은 한정된 자원을 구해 행복감을 드높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행동 양식은 바뀐 적이 없다.
영화 속의 한정된 자원은 처음에는 ‘돈’이었고, 중반부에는 ‘젊음’이었다가, 아내를 버리고 저항군에 뛰어드는 남편의 결심이 보이는 마지막에는 ‘무기’로 바뀐다. 기업 대표인 생명공학자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다 딸의 젊음을 강탈당했고, 남은 인생을 저항군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오래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보다 ‘내 삶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산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영생은 행복의 아주 작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불로초를 찾았던 진시황에게 영생의 부작용으로 알츠하이머(Alzheimer)가 동반된다고 했다면? 과연 그는 불로초를 찾아다녔을까?
‘행복’이 남들의 한정된 자원을 빼앗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몰래 방화하고 일부러 자동차 사고를 내면서까지, 심지어 납치, 협박, 살인을 하면서까지 ‘행복’해야 하는 것인지 돌이켜 보게 된다.